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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순미 시인 / 불온한 사과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4.
손순미 시인 / 불온한 사과

손순미 시인 / 불온한 사과

 

 

사과가 논다 접시에 앉아 빨갛게 사과가 논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 사과 혼자 접시에 논다

창가에는 스스로 제 손목을 자르는 나무가 있고

사과는 진한 데생의 정오를 가진다

햇볕이 사과만 한 주먹을 뻗어 사과를 만진다

사과는 차갑다 사과는 뜨겁다

단발머리 소녀처럼 부끄러운 사과가 까르르 웃는다

건강한 잇몸을 드러내고 빨갛게 웃는다

나는 사과를 굴린다

사과의 문을 열고 소녀가 나온다

향기는 발랄하다 향기는 어둡다

사과는 이리저리 나를 달아난다

나는 사과를 발기한다

잔혹한 10월이다

 

 


 

 

손순미 시인 / 이팝나무

 

 

땅 구덩이 속에 가마솥 걸어놓고 밥을 짓고 있는 중 이에요

고정관념이 늘 문제였지요

햇살을 끌어들였어요 어디 햇살 뿐 이겠어요

뜨거워진 관절들이 고통의 입김을 토해내더군요

솥뚜껑을 열었지요

모락모락 설익은 밥 냄새를 풍기며 어린잎들이 속속 피어나데요

하늘 아래 놓인 눈부신 한 그릇의 슬픔에 경배했어요

떠도는 새들이여

그리고 불쌍한 삶이여

이리 와서 내가 지은

이 기가 막힌 밥 한 그릇 드시오

 

-현대시학 (2002년 7월호)

 

 


 

 

손순미 시인 / 작약이 피는 동안

 

 

 붉은 비단처럼 요요한 작약이 핀다 이까짓 것! 어머니는 댕강댕강 작약의 목을 친다 밭고랑에 작약의 머리통 흥건하다 또, 지랄이야! 아버지의 화려한 정원은 끔찍한 현장이고 날씨는 환장하겠다 들판을 타고 산을 타고 천지사방 작약을 타던 어머니가 고질적인 혁명을 일으켰다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아욧! 백합나무 가로수를 따라 어머니의 흰 저고리가 나비처럼 날아간다 속수무책 아버지의 농업은 망하지도 못했다

 

 물냄새 연한 유월, 비자나무 숲 산비둘기 처연한 울음 마을로 내려오고 붉은 작약의 주술이 들린 어머니는 위험하다 작약의 꽃 속에 빗물이 고인다 젖 달라는 동생의 채근을 뿌리치고 어머니는 술냄새를 풍긴다 툭툭, 붉은 작약이 지고나면 어머니의 백일몽白日夢은 수습됐다 작약의 구근들이 밭고랑 가득 넘쳐났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다시 경작한다

 

-2005년 현대시학 12월호

 

 


 

 

손순미 시인 / 저수지

 

 

 저렇게 무거운 남자를 떠받치고 있었다니! 고작해야 똥방개, 소금쟁이, 개구리밥이나 띄우고 바람의 물결이나 만들어내던 저수지가, 돌멩이를 아무리 던져도 싱겁게 웃기만 하던 저수지가 천하장사보다 센 힘으로 익사체를 힘껏 떠받치고 있다 익사자는 자신의 마지막을 아내보다 사장보다 저수지에다 심경을 고백했을 것이다 익사자의 와이셔츠는 빵빵하게 부풀어 있다 봄은 오도 가도 못하는데 오늘 저수지의 책임은 저 와이셔츠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햇살이 달려오고 경찰이 달려오고 와이셔츠의 죽음은 운반되었다 그제야 힘을 뺀 저수지가 모처럼 헐렁한 잠에 빠졌다.

 

 


 

 

손음 시인 / 한 송이 피아노

 

 

 피아노 건반을 누르자 향기가 스며든다

 창문을 열어보니 골목은 백합 한 송이

 미열의 시절 한 사람의 숨에게

 나는 경건한 손목 하나를 바쳐

 느리고 낮게 피아노를 친다

 피아노는 허공에 있다

 만개한 향기의 속살이 피아노 속으로 뛰어든다

 더 이상 이렇게 살기 싫어!

 죽은 시인의 바이브레이션처럼

 한 송이  피아노가 향기를 운다

 

 나는 창문을 닫고 피아노를 친다

 나는 향기를 닫고 피아노를 친다

 누군가 왔다가 그냥 가버린 자리는

 시간이 불어난다

 검고 어두운 향기가 내 손목을 휘감는다

 피아노는 오고 있다 가고 있다

 

 피아노는 검은 눈

 피아노는 언 손톱

 피아노는 도마뱀

 

 피아노는 꼬리

 피아노는 한 사람 건너의 사람

 

 나는 피아노를 안아본다

 한 송이 피아노를 안아본다

 피아노는 내게서 사라진다

 

-문예지《서정과현실》 2022년 하반기

 

 


 

 

손순미 시인 / 제비

 

 

 공사장 15층에서 그는 낮잠에 빠졌다. 꿈속에서도 망치질을 하는 듯 두 손을 불끈 쥐고 있다. 14층, 13층, 느슨한 잠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의 영혼은 두고 온 지상의 집을 다녀간다. 여~보, 아내는 세탁기를 돌리고 있는 것이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 한 번 아내의 배꼽 같은 초인종을 누른다. 딩~동 아내의 이름처럼 부드럽지만 쓸쓸한 집의 목소리. 그는 집안 곳곳에서 아내가 버리고 간 추억을 뒤진다. 낡은 슬리퍼, 물방울무늬 원피스... 여보, 우리는 제비 같아요, 평생 남의 집 처마 밑만 떠돌며 살아 왔으니. 그때 아내의 눈이 우물처럼 깊어져 있었던 것인데, 세상 어디에 살아도 지구의 처마 밑이긴 마찬가지 아닌가 뭐! 아내는 돌아올 것이다 아내는 돌아올 것이다. 나의 처마가 그리워 지지배배 제비처럼 돌아올 것이다. 그가 외우는 봄날의 주문에 황급히 피어나는 불안한 꽃들.

 

 


 

 

손순미 시인 / 그 집에 내리는 비

 

 

 이웃들의 수다는 끊겨 있고 시간은 보이지 않는다 빈방과 거실 버려진 모든 것들이 버려짐으로 살아 있다 그들은 모든 슬픔을 무책임하게 장악하고 있다 사방으로 매달린 녹슨 창문은 그 슬픔이 빠져나갈 틈이 없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썩은 반찬 냄새가 아우성치고 있다 푸른 냄새의 공화국이 생겼구나 그 곳엔 또 다른 生이 은밀한 번식을 하고 있다 액자 속의 가족들은 단장된 거실을 배경으로 웃고 있다 웃음은 버려져도 웃고 있다 꿈은 서둘러 그 배경을 빠져나가고 집은 침묵을 장기 수혈 받고 있다 이 집의 힘은 저 버려진 웃음 속에 있을까

 

 전기가 끊긴 집에 어둠이 들어온다 흐트러진 집안의 집기와 모든 슬픔들이 그 어둠에 안긴다 근처 아파트 불빛이 밤새도록 집의 내력을 밝혀내고 있다

 

 


 

손순미 시인(손음)

1964년 경남 고성 출생. 경성대국어국문학과 졸업. 고려대인문정보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 199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및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칸나의 저녁』. 2008년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2011년 부산작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