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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성일 시인 / 바보하고 천사하고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4.
오성일 시인 / 바보하고 천사하고

오성일 시인 / 바보하고 천사하고

한 사내아이가 있었다

부모는 어려서 헤어졌다

그 뒤 엄마는 병이 나 죽었다

엄마는 경이라고,

노래를 잘하던, 어릴 적 내 친구였다

그 애가 결혼하는 날이었다

그 애는 입이 큰 아이였다

신부가 천사처럼 예뻤다

새 여자와 살고 있다는 아버진 오지 않았다

혼주 자리에 늙은 이모가 혼자 앉아 있었다

그래도 그 아인 웃고 있었다

입이 큰 아이가 바보처럼 벙싯벙싯 웃고 있었다

천사 같은 신부가 대신 울고 있었다

바보 같은 아이가 눈물을 닦아주었다

바보 같은 아이는 눈물 닦는 법을 잘 아는 아이였다

오늘부턴 천사하고 저 아이하고

헤어짐도 버려짐도 없는 데로 가서

운명이 따라오지 못하는 먼 데로 가서

운명 몰래 둘이서만 살라고,

깊고 외딴곳에 가 서로만 위하다 죽으라고

하얀 백합꽃이 놓인 테이블 위에

나는 가만히 젖은 손을 모았다

 

 


 

 

오성일 시인 / 나무야

 

 

옆구리로 밀어낸 두어 개 잎을 보니

네가 은행나무였던 걸 알겠다

 

톱날이 지난 자리 나이테를 보니

서른 살쯤 먹었던 걸 알겠다

 

바람이 불자 파르르 잎을 떨어

다시 아득한 한 생애를 시작하는 나무야

 

삼십 년, 혹은 오십 년쯤 뒤에

또 한 번 발목까지 몸뚱이가 베어진대도

 

그것이 나무의 나무된 일인 줄만 알아

여린 잎 하나를 가까스로 밀어 올리며

 

아득한 나무의 일생을 다시 시작할 나무야

 

-시집 『미풍해장국』에서

 

 


 

 

오성일 시인 / 아무개의 빙부상

 

 

생전 본 적도 없는 이의 빈소에 가서

죽음과는 아무 상관없는 얘기로

두 시간을 떠들다 왔다

안 죽어본 놈들끼리

그 잘난 삶에 대해 말이 많았다

나 죽은 날도

생면부지의 객들이 저희끼리 이마를 모으고

그까짓 사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주고받고 있겠지?

죽어보지도 못했으면서, 표정들은

나보다도 심각하겠지?

 

 


 

 

오성일 시인 / 산촌

 

 

오리야, 한겨울인데

해질녘 눈발 지는데

 

노인 영감 무쇠솥에 물 끓인단다

 

날은 저물어

장작 환한데, 오리야

 

울 넘어서 뒤뚱뒤뚱 도망가거라

 

-예컨대 노박덩굴 (2021.12. 고요아침)중에서

 

 


 

 

오성일 시인 / 집으로

 

 

어떤 나라에선 집 없는 이들이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감염병에 자가격리를 못 해서였다는 것입니다

네 집에 있으라,는 벼락 같은 저 말.....

세상 어디에 제 몸 하나 숨기지 못해 떠돌다 간

이름들을 호명하며

어느 날 밤 하루쯤은 안 들어갈까 생각도 했던 집으로

나는 얼굴 반쪽을 가린 채 들어왔습니다

 

-시집 「미풍해장국」 에서

 

 


 

 

오성일 시인 / 티타임

 

 

우리 회사 구내 커피숍 이름은 티타임입니다

잘생긴 청년이 빨간 티에 까만 안경을 쓰고 커피를 팝니다

그는 큰 소리로 꾹꾹 글자 눌러 쓰듯 말을 하는데

연필심처럼 그의 말은 자주 툭툭 부러집니다

지적장애가 있다고 합니다

그의 얼굴은 커피색, 티타임 메뉴판은 녹두빛입니다

거긴 가지가지 슬픈 메뉴들이 있습니다

뜨거운 슬픔과 차가운 슬픔과

쌉쌀한 슬픔과 달달한 슬픔과

여러 슬픔들을 믹서에 갈아 섞은 슬픔이 있습니다

큰 컵은 좀 비싸고 작은 컵은 좀 쌉니다

나는 티타임 주문대 앞에서 슬픔의 목록을 올려다보다가

무어라 말하고 아득히 무슨 생각인가에 잠겼습니다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하고 그가 외쳤습니다

뜨거운 커피를 시켰다고 생각한 나는 혼자 먹먹해졌습니다

 

 


 

 

오성일 시인 / 재환이 형

 

 

판자로 지은 재건중학교*가 있었다

읍내 가는 버스길로 고개를 넘으면 내리막길 중간 쯤

배추밭 하나를 건너 산자락에 있었다

거기 다니던 재환이 형은 공을 잘 찼다

아주 군침이 돌게 킥을 잘했는데

뒤에 그 형은 풀 죽이는 약을 먹고 죽었다

남들 다니는 중학교 못 다니고

재건학교 나왔던 게 창피했던 것 같다

졸업하고 어디서 돈 벌러 다닌단 얘길 들었는데

보잘 것 없는 돈에도 풀이 죽었겠지만

그 숫기 없는 마음이 세상에 많이 채였던 것 같다

아니, 제가 제 마음을 차는 날이 더 많았을 것이다

축구나 시켰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걷어차는 일은 속상한 사람들이 잘 하니까…….

지금도 나한테는 축구 하면 메시보다 재환이 형이다

우리나라 축구가 힘을 못 쓸 때면 나는

재환이 형 같은 사람이 나와서

재건을 좀 해야 된다는 생각이 근질거린다

그 형 죽은 지 삼십 년이 넘었는데도

 

*​1960-70년대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운영되던 학교

 

 


 

오성일 시인

1967년 경기도 안성 출생. 연세대학교 졸업. 2011년《문학의 봄》을 통해 등단. 시집 『외로워서 미안하다』 『문득, 아픈 고요』 『사이와 간격』 등. 〈작은 詩앗 채송화〉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