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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운기 시인 / 책과 나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5.
고운기 시인 / 책과 나

고운기 시인 / 책과 나

 

 

예쁜 여자 훔쳐오듯 데려와 살았다

 

어느새 방 하나를 요구한다

저의 방 하나 마련하려 살아가는 나날이다

 

한때는 요행히 방을 준 적도 있었다.

정중히 헤어질 것을 요구한 적도 있었다

 

남의 집에 저를 맡겨두고

먼 데로 떠돌거나 가끔씩 들러 눈을 맞춰보기도 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정 깊어진 여자

 

하기야 깊이 사랑하고 자식을 낳기도 하였다

드디어 늙어서는 먼지만 쌓인 네 몸뚱어리를

끝내 버리지 못하고 챙긴다

 

다시 욕구가 생길 때는

새 여자보다 헌 네 몸을 탐하게 될까

 

자식을 얻겠다는 생각은 웬만큼 사라지는 나이.

 

 


 

 

고운기 시인 / 나무는 바람을 만들고

 

 

떡갈나무 가지가 흔들리네요,

세상의 가지들이 흔들려

지상에 바람 먼저 일으켰다는군요

 

나무는 바람을 만들고

바람은 나무와 나무가 전하는 안부

 

바람 속에는 가지 찢기운 소식도 있더군요

내 두 손으로 받아 읽다가 접어두면

가슴속 어디선가 맴돌며 구르는 잎의 소리

 

떡갈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날

더이상 흔들리는 것 아닌 흔드는 것

 

 


 

 

고운기 시인 / 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

 

 

흙 묻은 자갈이 낮잠 자는 옛길

새로 만든 도시의 사람 드문 골목길

강둑 기슭에는 꽃을 내려놓고 푸르게 움돋는 개나리 잎

뺏길 뻔하다 겨우 살아남은 언덕길

 

나는 자랑같이 자전거를 타고

머리카락 좀 흩날리면서

 

돌아오지 않을 강물과 인사도 나누다가

 

거슬러 거슬러

입에서 터지는 대로

거슬러 거슬러 가슴에 담은 정이

묵은 대나무처럼 솟구치도록

 

 


 

 

고운기 시인 / 비빔밥

 

 

혼자일 때 먹을거리치고 비빔밥만한 게 없다

여러 동무들 이다지 다정히도 모였을가

함께 섞여 고추장에 적절히 버물려져

기꺼이 한 사람의 양식이 되러 간다

허기 아닌 외로움을 달래는 비빔밥 한 그릇

적막한 시간의 식사

나 또한 어느 큰 대접 속 비빔밥 재료인 줄 안다

나를 잡수실 세월이여, 그대도 혼자인가

그대도 내가 반가운가.

 

 


 

 

고운기 시인 / 예수가 우리 마을을 떠나던 날

 (부제: 都城 밖 대장장이의 노래)

 

 

진달래 꽃 피면 돌아오겠네

벚꽃 만발하면 만나보겠네

그리운 이름들 어디 가도

불러서 모이면 쑥 캐러 가자

봄비라도 내리면 알맞게 맞고서

사랑하던 사람 등에 업고도 가리

허기사 봄도 오면 무엇하리

그대 떠날 때 우리에게 남겨준 것이

서울로 가던 밤 피흘리며

기도해 준 일

가슴마다 허전함으로 슬픔 그득하여

개나리꽃 터졌어도 눈물만 뿌릴 뿐

 

그대의 아비도 나만큼이나 천한 사람

일생을 목수질하며 살아왔을 땐

아들이 장차 자라 로마의 군인이나 제사장이나

세리가 되어 돈을 벌고

좋은 집에 살며 세상 일은 잊으라고

그렇게 바란 것은 아니었을 테지

 

허기사 봄도 오면 무엇하리

나귀 새끼 한마리에 몸을 싣고

그대는 가서 서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그리운 고향 봄이 피어 오른 산천 뒤로 두고

진달래꽃 같은 붉은 피 흘린다니

 

나는 아직 도성 밖 대장간에 앉아

불에 담근 쇠를 꺼내 망치질 하면서도

이 못이 장차 그대의 손을 뚫고 발을 뚫고

이 만드는 창으로 그대의 가슴를 찌르게 될지

알 수 없다네

알 수 없다네.

 

 


 

 

고운기 시인 / 제비

 

 

2004년 6월 27일이었다

 

전북 고창군 미소사 요사채의 처마에

새끼 네 마리를 낳은 제비 부부와 만났다

 

밤이었다

일본의 옛 노래를 공부한 선생이

나지막이 불렀다

서기 6세기 귀족의 노래

 

-그대가 떠난 궁정에

그대의 옷자락 휘날리던 바람만 남았네*

 

제비 부부는

새끼들에게 둥지를 내준 채 처마 밑 전깃줄에 앉아 자는데

머리는 둥지를 향하고 있었다

궁정을 떠나듯

둥지를 버리리라

 

전깃줄만 남을 것이다

 

 


 

고운기 시인

1961년 전남 보성에서 출생. 한양대 국문학과와 연세대 대학원 국문학과 석사 및 박사 과정 졸업.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시집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섬강 그늘』 『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신화 리더쉽을 말하다』 『모험의 권유』 등.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中. 2007.~2008. 일본 메이지대학교 문학부 객원교수. 현)한양대학교 문화컨텐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