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건호 시인 / 때늦은 후회
지금도 가슴 시린 것은 내일이면 또 만날 것으로 알고 손 한번 못 흔들고 헤어진 사람이었다
다시 찾을 줄 알고 낙서 한 줄 못 남기고 떠나온 담벼락 이미 허물어진 골목길이다
붉어진 얼굴로나마 고백이라도 해보았으면 붙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그 사람
세월 지나 낯선 거리 사내 아이 손잡고 지나치는 뒷모습 황망하지만 지나온 길모퉁이마다 망설이고 또 망설이며 고백하지 못한 까맣게 많은 말들 무서리 덮인다
눈 내리는 어느 겨울날 처마 밑 제비 되어 찾아와 여름내 흙집 짓고 울다 떠난 인연 아닌 인연의 빈 터 화들짝 놀라 쳐다보는 텅 빈 제비집
삭풍에 기타줄처럼 걸린 거미줄 어수선한 공명에 때늦은 후회를 하는 것이다.
전건호 시인 / 골절된 시간
팔다리에 상처가 난 시간을 반창고로 둘둘 만 채 끌고 온 바람은 나를 쉽사리 용해시켰다
자꾸만 하류로 밀어냈으므로 끊어지려는 걸음을 절뚝이며 오래 아팠다 불구의 몸 안에서 열망의 시간들이 분해되었다
마음의 토사를 모아 둑을 만들었으니 지나온 시간의 부유물이 수면을 덮었다 수많은 지류의 발목을 잡은 저수지에 발자국들이 수몰되면서 둘이 걸어온 길은 어류의 항로가 되었다
수면을 가위 누르는 달빛에 우울과 고독이 돌연변이를 해 지느러미 키운 물고기들이 포획되는 동안 나는 조용한 파문을 그리는 달빛에 몸을 맡기는
물풀이 되어 조용히 흔들렸다
거센 시간의 흐름을 만드는 강의 상류를 골똘히 생각할수록 생각의 궁극에서 피어나는 꽃잎들
이슬 속에 갇힌 지난날들은 미토콘드리아 같이 당신에게 구부러졌다 골절된 시간의 허리에 매달려 당신을 추억한다는 사실만으로 잡힐 듯, 기다리던 안부들은 물풀처럼 키를 키웠다
붕대에 둘둘 말린 아홉 개의 꼬리를 단 욕망들이 거친 부들 꽃대를 밀어올린 채 흔들렸다
전건호 시인 / 꽃점을 치다
당신은 전생에 상제궁의 선관이었던 거라 어느 봄날이었을 게야 춘흥을 못 이겨 선녀들 사는 후궁 넘본 죄로 인간 세상에 떨어진 거라 아직도 제 버릇 못 버리고 예쁜 꽃 보면 아직도 못 꺾어 안달하는 거라 돈 많으면 또 방탕해져 술 여자 밝힐 게 뻔해 살림살 이 곤곤하게 주신 거라 그래도 품안에 자식이었던지 가끔은 하늘에 상제궁 쳐다보라고 갈까마귀 외로운 사주 점지하신 거라 아뿔 사 접동새 우는 봄밤 혼자 몽정하다 잠 못 이룬다는 거라 그 통에 매화꽃 비처럼 내리고 밤꽃향에 화개골 여자들 얼굴 붉히는 거 라 꽃 한번 잘못 꺾은 죄로 하얗게 핀 찔레 넝쿨에 갇혀 백년을 지내고 있다는 거라
전건호 시인 / 배롱꽃
이빨갈던 겨울이 지났다 사내 모스부호 같은 뜻모를 싯귀 읊조리던 뒤란 뒷간 벽돌 사이로 배롱꽃 붉다 벌들 처마 밑 붕붕거리고 가슴앓이 하던 생애는 마침내 화르르 몸에서 꽃잎 쏟아낸다 몇 달째 던가 붉게 날 세운 칸나 꽃에 심장 찔린 건지 가슴 앓이하던 배롱꽃 내게 들어와 만발한 것인지 뒷간에 앉기만 하면 붉은 꽃 배롱도 그리며 떨어진다 삶에 힘을 주어야 하고 속앓이 해야 하는 날들 실핏줄 하나 하나를 곤두세우며 붉게 엉키더니 담쟁이 넝쿨에 감겨 몸 비틀며 파르르 떨던 배롱꽃 난산하듯 진통하며 꽃잎 쏟는다 턱에 걸릴 듯 숨가쁜 비탈길 너머 먼지 자욱한 하늘엔 낮달 점점 핼쓱해지고 내 안에서 일어서는 관능과 음모 화간하듯 검붉게 속 앓이하던 생애 뒤엉켜 만발하다 뒷간에 앉아 열꽃을 쏟는다
전건호 시인 / 백년만의 폭설에 길을 잃다
서울행 열차가 부산행 열차와 스치는 순간 반대편 열차의 차창으로 찰나에 마주친 얼굴
소실점을 통과한 기자가 전속력으로 그를 향해 질주했네 바늘구멍 속 빛의 소용돌이에서 잠을 깬 박쥐처럼 텅 빈 섬광에 놀라듯 소스라쳤다 거꾸로 매달려 잠들던 기억들 일제히 부화하여 머릿속은 아뜩해졌다
단막극 보다 허무하게 스쳐가는 찰나의 추억 빛 한 줄기를 질겅거리던 눈시울에 울컥 울음이 박히도록 그림자를 향해 오감을 세웠으나 어둠으로 가득 넘쳐버린 차창 폭설은 차창 가득 넘쳤다
장미 한 송이 추억하며 어깨 들썩이는 나를 소음들 덜컹대며 몰려들어 나를 다독였으나 울음은 급행열차를 탔다
숨을 거두는 새벽별들이 뿌리는 눈물의 파편만 차창에 매달렸다
중음계를 떠돌던 유령들마저 눈물에 몸을 감추고 소멸된 빛 한줄기에 휘말린 나를 연민했다
환승해야할 길 폭설에 지워져버렸다
전건호 시인 / 살금살금
아내의 히스테리 피해 살그머니 문을 빠져나와 막내와 어둠 저편 108호를 관찰한다
정육점 같은 불빛 속에서 내가 요리되었구나
파처럼 잘리고 마늘처럼 쪼개지고 양파처럼 벗겨지다가 미원 한 스푼 머리에 뒤집어쓴 채 양념되었구나
아내를 열 받게 하던 후덥지근한 저녁, 드디어 비 내린다
움푹 패인 웅덩이마다 빗물 고여 미사리 밤풍경 같다 비가 오면 마음도 눅눅해지는지 아내는 창틀에 턱을 괸다
스트레스 까맣게 잊고 모차르트를 걸고 밖을 본다 어둠 속 우리 보일 리 없지만
쉿, 엄마에게 걸리면 우린 죽음이예요 막내가 입술에 손을 댄다
방충망 음표처럼 맺힌 빗방울 속으로 그녀, 금붕어처럼 헤엄쳐 들어간다 이제 자유로울 수 있겠구나
네 엄마는 물고기자리로 떠났어
우린 저 물방울 중 하나 가만히 스며들어 잠들면 되는 거야 살금살금 우리 방으로
전건호 시인 / 이번 생은 여기까지란 말이 슬펐다
장미 한 송이 피어나는 시간 차를 마시던 여자와 헤어졌고 어둠의 입자들은 자욱한 포말이 된다
꽃이 피어나는 사연을 캐물은 들 무엇하랴
벌어진 꽃잎에 숨어있던 한 점 어둠의 밀도가 점점 짙어지는 동안 내가 그린 그림을 알아보지 못하는 나를 외면하는 가로등
몇 개의 다리를 건너야 어둠의 심연 속 깊이 잠든 빛의 입자들이 깨어날까
붉은 꽃잎 흔들릴 때마다 비 맞은 나무들은 중얼거린다
꽃이 떠나가는 것은 바람의 수신호일 뿐 꽃이 변심한 것은 아니야
날마다 물 주어 키운 꽃이라도 사랑의 종점은 다르거든
우리의 종점은 당고개와 오이도
이번 생은 이게 전부란 말이 슬펐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장정자 시인 / 양철지붕 집 외 6편 (0) | 2025.11.05 |
|---|---|
| 김명기 시인(울진) / 성호를 그으며 외 6편 (0) | 2025.11.05 |
| 고운기 시인 / 책과 나 외 5편 (0) | 2025.11.05 |
| 감태준 시인 / 내가 세지 못하는 것 외 6편 (0) | 2025.11.05 |
| 오성일 시인 / 바보하고 천사하고 외 6편 (0) | 2025.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