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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자 시인 / 양철지붕 집
그 집에 사는 사람은 소리의 탑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데 지붕위로 흐르는 계절도 낚아채 탑 속에 차곡 재워놓고 참새소리 까치소리 탱자 꽃 터지는 소리도 녹음해놓고 소나기 소리에 콩 볶아먹고 나뭇잎 떨어지면 지짐 부쳐 먹고 바람 스산한 날엔 귀신놀이, 눈 오는 날은 시뻘건 장작불로 달인 조청 먹는 날 소리란 소리 모두 쌓아놓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리듬이 저절로 몸에 흐르네 멜로디 스틱같이 길고 짧은 키가 토닥토닥 노래가되다 와르르 무너져 이별이 눈물이 슬픔이 아코디언같이 흩어졌다 모였다 그 또한 음악이 되어 모두 쌓이고 바람 불지 않아도 지붕이 웅웅 우는 때, 집이 혼자 구시렁거리면 지붕이 나이 먹는 소리라고, 때로는 집도 사람의 가슴으로 피접 드신다며 몸가짐 조용히 아버지 말하셨네 그 탑 속의 오래 된 젖은 소리 꺼내어 말려 놓는 일 소리도 잘 익어 화엄 되어 다보탑 석가탑 된다는데 귀는 녹슬어도 작고 낮고 젖은 제 소리는 멀리서 구신같이 알아듣는 집
-<다시올문학> 2010. 봄호
장정자 시인 / 뒤비지 뒤비지
아침에 참새보다 작은 깃털 예쁜 새 여러 마리 그림자도 없이 나뭇가지 사이로 옮겨다니며 뒤비지 뒤비지 뒤비지 새의 말로 주고받고 있다 아침이면 어미 새가 또 그 어미 새가 새끼에게 들려주는 뒤비지라는 말
그 나무 밑에서 참새보다 큰 새 한 마리 아침 햇살처럼 떨어진 그 말을 꼭꼭꼭 낟알처럼 쪼아먹다 모서리가 깨어진 말 뒤,비,지,마,를 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문득 뒤돌아본다 내 그림자에 젖은 깃털 몇 개 얹혀 있다 아직 따뜻하다
장정자 시인 / 스타벅스 or 커피 빈
주문or낮게 어둡게 빠른 말or혀 굴리기 긴 메뉴 복잡한 이름or복잡하지 않게 쇼트or톨 핫or아이스 케이크or우유 바케트or크로와상 모르면or끄덕 끄덕 얼키고 설킨 어깨끈다리옷or쫄 바지 딱딱한 의자or칙칙한 나무 바닥 좁은 의자or다리 포개고 까닥까닥 대기시간 멀뚱멀뚱or얌전 겸손 세련 빠른 속도 어둡게 말하는 게 룰인 스타벅스 커피 빈 스타벅스가 긴 물결머리 사이렌 어깨에 한 팔 기대자 더 빠르게 더 어둡게 룰이 전환되는 스타벅스or커피 빈 세련이 구태의연을 사이렌이 어깨끈다리옷도 없이 젊은 입맛을 유혹하는 아이스캬라멜마끼아또or아이스타조차이티라떼를 그란데로 주문하면 부드러운 리듬으로 나는 말하지 빨리빨리 다모토리 다모토리 처음으로 거친 파도처럼 웃는다 스타벅스or커피 빈 스타벅스or커피 빈이
장정자 시인 / 자귀나무 -금강선원
오늘 당신의 꿈은 황제나비가 날아가는 북미 쪽에 가깝다. 홍천강변 폐교 한 켠 자귀나무 위 검은 나비 수백 마리 붙어 있다 몽유처럼 치르는 이 숨 가쁜 제의, 꼬리 긴 검은 예복은 죽은 꽃에 대한 예의다 까맣게 바라춤을 추고 있는 저 나비들의 고요한 조문, 나무들은 저 검은 어둠 들이마셔 잎을 모아 빛을 낳는다 분홍 속눈썹 키우고 내 입술 속 분홍으로 들어와 눈뜬 채 잠든다 꼬리 긴 검은 나비가 날마다 불고 온 연인처럼 떨어뜨리는 우윳빛 잠, 여름밤 몽유로 당신이 자귀자귀 부르면 꿈은 황제나비 날갯짓으로 순례에 들지 뜬눈으로 보면 세상은 귀신 들리지, 저 깐깐한 검은 밀약들, 수천 개의 비손이 손바닥을 펴고 날아오른다.
장정자 시인 / 황금무당 거미
제 무게보다 천 배나 무거운 암거미와 짝짓기 나선 황금무당거미 길고 가느다란 다리로 거미줄을 퉁기며 혼인 춤을 추고 있다 천 배나 큰 세계에 몰입된 저 묘약의 의심스러운 약효 생각해 보라, 재빨리 달아나지만 일천 배의 비례란 탕진한 사랑이 건너기엔 너무 가혹한 거리다 입이 버적버적 말라 바작바작 먹히고 있다 군침 당기는 사랑 이야기일 수도 있다 군침 당기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라 해도 정말 먹히기 위해 일생 歿弦琴을 타는 것이 아니겠는가
장정자 시인 / 토마스네 집*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다 나는 지금 파마를 하고 있다 작은 의자에 앉아 머리 위에는 날개가 두 개뿐인 온풍기가 서서히 돌며 비닐 씌운 내 머리칼을 동골동골 굽고 있다 나는 구석 벽에 걸려 있는 가로 일 미터 세로 육십 센티의 토마스네를 보고 있다 나는 거실 쪽에 앉아 있다 맞은편에 큰 창문이 있고 현관문은 열려 있다 창문밖엔 잔디가 푸르고 그 너머 강이 있고 그 너머 산이 있다 해는 없어도 아주 밝다 거실엔 창문 쪽으로 보통 크기의 둥근 탁자가 놓여 있고 그 밑에 중국풍의 푸른 꽃병이 있다 몇 송이 꽃이 꽂혔는데 꽃병의 꽃인지 밖에서 올라온 꽃인지 여기선 좀 멀다 가운데는 작은 탁자가 있고 두께가 얇은 일인용 둥근 안락의자가 있다 비어 있다 바닥에 흰 타일을 깐 사방 둘레에는 연한 살빛 타일이 깔렸다 왼쪽 벽 쪽으론 크고 까만 긴 책상이 있다 네 개의 다리에는 금장식이 붙었다 그 앞에 녹색 의자가 놓여 있다 부드럽고 가냘픈 다리 때문에 공중에 떠 있다 벽과 문들은 흰색이다 조용하다 원근법이 지워진 이 수채화를 누가 “잠시 멈춤”을 시켜 놓았다 모두 열여덟 개가 넘는 색깔만 살아 있다 나는 순간포착으로 모든 다리를 걷어 내었다 한 순간 멈추고 있는 것들은 그냥 멈추고 있다가 푹푹 쓰러졌다 숨을 쉬기 시작했다 산 속의 나무가 움직이고 산이 그늘을 만들고 강이 흐르고 잔디가 일어섰다 문이 열렸다 닫혔다 했다 이제 토마스네는 어질러진 집을 치우려 올 것이다 나는 파마를 하고 있었고 온풍기는 바작바작 머리를 굽고 있었고 나는 토마스 문패가 붙은 이 집을 슬쩍 빠져 나오면 되었다
*THOMAS MCKNIHT 그림
장정자 시인 / 고등어자반 한 손
죽어서야 껴안아지고 업혀지는 걸 지느러미 그 매끄러움이 너를 밀어내는 줄 몰랐지 탄력의 면적만큼 생이 탄탄하다 했었지 한 번도 안아본 적 업혀본 적 없었지 홀로 흔들리다 혼자 바다를 물 먹이며 사는 줄 알았지 연애에 지치고 사랑이 아플 땐 어떻게 견뎠니? 때로 몰려 그물에 첨벙첨벙 뛰어들었니? 그런 거였니 간잽이 손에 들려 있는 상한 속과 벗겨진 비늘들 지금 껴안고 업혀 있니, 한손이라고 부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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