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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기 시인(울진) / 성호를 그으며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5.
김명기 시인(울진) / 성호를 그으며

김명기 시인(울진) / 성호를 그으며

 

 

 다녀가신 지 이천 년이 되도록 변한 게 없습니다 티브이를 켜면 핏기 없는 건기의 누 새끼처럼 굶주린 아이들이 뒤틀린 팔다리로 누워 있습니다 잔반통엔 버려진 음식이 쌓일 대로 쌓이지만 아이들을 살릴 물고기와 보리떡은 턱없이 모자랍니다 봉사가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서려면 큰 병원에 전 재산을 다 밀어줘도 불가능합니다

 

 젖과 꿀이 흐를 거라던 가나안은 혈흔이 낭자한 채 피를 머금은 이들이 원수가 되어 적개심을 키우며 끝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모세가 아니라 모세의 아버지가 온다고 한들, 깊이조차 가늠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늪에서 노예나 다름없이 굴종을 강요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이주노동자, 매 맞는 여성과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지는 아이들을 구할 수 없습니다

 

 수천수만의 성도를 끌어모은 교회는 세 치 혀로 지키지도 않는 고린도전서를 제 것처럼 팔아 땅을 사고 부를 불려 대물림합니다 주일이면 교회 앞 도로를 주차장으로 만들어 버리면서도 세금조차 내길 거부합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란 말 따위로 우리를 달래시려면 그냥 이대로 끝나게 하옵소서 죄를 사하기도 전에 켜켜이 쌓이는 죄업 속에서도 부활을 믿으며 기다리다 지쳐 죽어 간 이들이 차고도 넘칩니다 믿기지 않겠으나 당신의 이름은 이곳저곳으로 팔려 다닌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한 번도 약속하신 곳으로 부름을 받은 적이 없는 우리는 그곳의 안락과 평화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혹여 그 안락과 평화에 빠져 다시 돌아올 거란 약속을 못 지키는 것이라면 이곳이 분명 지옥이라는 반증이겠지요

 

 며칠째 비가 내립니다 비교적 세상을 공평하게 적시는 비마저도 누군가의 굴욕을 빨아 내리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불신조차 믿음의 말씀으로 둔갑한 지상의 한 귀퉁이에서 그래도 당신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만, 정말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제기랄!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에서

 

 


 

 

김명기 시인(울진) / 시인

 

 

앞집 할매가 차에서 내리는 나를 잡고 묻는다

사람들이 니 보고 시인 시인 카든데

그게 뭐라

 

그게……

그냥 실없는 짓 하는 사람이래요

그래!

니가 그래 실없나

하기사 동네 고예이 다 거다 멕이고

집 나온 개도 거다 멕이고

있는 땅도 무단이 놀리고

그카마 밭에다 자꾸 꽃만 심는

느 어마이도 시인이라

……

 

참, 오랫동안 궁금하셨던 모양이다

 

 


 

 

김명기 시인(울진) / 베이글과 커피 그리고 천치

 

 

북녘 바다가 보이는 천진 해변에서

천진하게 베이글과 커피를 마시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뉴스를 본다

 

오늘 오미크론 감염자는 십 칠만 명이고

누적사망자는 백신 부작용 포함 만 명이나 된다는데

관료들은 치명률이 낮다며 별일 아니란 듯 말한다

 

언제 포탄이 날아와도 이상할 것 없는

고성 땅 천진해변에서 베이글에 커피 마시며

천진하게 앉아 있다가 천진과 천치가

별 차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943년에 태어난 우크라이나 할머니는

자신은 전쟁 중에 태어나 전쟁 중에 죽을 거라며

양손을 들고 아무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설마 설마 하며 천진하게 사는 사람들을

천치로 여기는 자들, 블라디미르 푸틴 같은

한국의 관료 같은

 

 


 

 

김명기 시인(울진) / 큰사람

장자인 나는 집안에서 처음 대학을 갔다

마을에서도 유일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대학이 못마땅해 통박을 주었고 엄마는

당신은 초등학교도 못 나왔는데 그게 어디냐며

통박을 통박으로 맞받았다 여든 살이나 자신 할머니는

밍기가 이제 큰사람 될 거라고 두고 보라며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을 하셨다

할머니는 끼니 때마다 반주 두 잔을 곁들였는데

나는 큰사람이 되기 위해 가끔 반주를 함께 마시기도 하고

주말이나 방학 때면 집 앞 여울가에 나란히 앉아

아버지 몰라 박하맛 나는 수정담배를 나누어 피우기도 했다

그럴 때면 우리 큰 새끼 우야든지 마이 배워

꼭 큰사람 되라고 말하시던 할머니

어느 해 이맘쯤 조반과 반주 두 잔을 달게 드시고

짱짱한 가을볕 속으로 꼿꼿하게 떠나셨다

나는 큰사람이 되기 위해 객지와 바다 위를 무시로 떠돌았지만

서른을 지나 마흔 넘도록 사는 일에 쫓겨 다니기 일쑤였다

볼 때마다 통박을 주던 아버지마저 선산의 산감이 되고서야

큰사람 되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오십이 넘어 무슨 큰사람이 될까 싶었는데

할머니 기제삿날 옷매무새를 갖추느라 거울 앞을 서성대다

장탄식을 내뱉었다 일백팔십이 센티의 키에 몸무게

백 킬로그램이 넘는 큰 사람이 거울이 다 차도록 서 있었다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걷는사람, 2021

 

 


 

 

김명기 시인(울진) / 시인

 

 

앞집 할매가 차에서 내리는 나를 잡고 묻는다

사람들이 니보고 시인 시인 카던데

그게 뭐라

 

그게······

그냥 실없는 짓 하는 사람이래요

그래!' 니가 그래 실없나

하기사 동네 고예이 다 거다 멕이고

집 나온 개도 거다 멕이고

있는 땅도 무단이 놀리고

크카마 밭에다 자꾸 꽃만 심는

느어마이도 시인이라······

 

참, 오랫동안궁금하셨던 모양이다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김명기 시인(울진) / 강변여관

 

 

이른 봄 먼 여관에 몸을 부렸다

움트지 못한 나뭇가지가

지난겨울 날갯죽지처럼 웅크린 저녁

피는 꽃 위로 어둠이 포개지고

흐르는 물결 속으로 달빛이 스민다

모든 게 한 번에 일어나는 일 같지만

오랜 생을 나눠 가진 지분들이 서로 허물을

가만히 덮어 준다 경계를 지우며 살 섞는 시간

낯선 세상에 와 있다는 건

욕망의 한 부분을 드러내

무던히 참았던 육신을 들어내는 일

시시해 보이는 창가 의자에 앉아

허물을 격려하지 못해 멀어진

사람들을 생각한다

잊어버린 주문처럼 쏠쏠한 이름

가끔 누군가도 나를 떠올리는

측은한 저녁이 올 테지

허물 대신 온기 없는 낡은 침대와

살을 섞으며 시든 불화의 목록에서

견디지 못해 그어 버린 경계를

그렇게나마 지워 보는 것이다

 

 


 

 

김명기 시인(울진) / 절망을 견디는 법

 

 

보증 서준 친구가 야반도주를 하고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구경해 본 적도 없는 큰 빚이 너무 억울해

배를 내밀어 보았지만 보증서에

핏자국처럼 선명한 날인이 말라갈수록

점점 더 단단하고 큰 빚쟁이가 될 뿐이었다

통장에서 빚이 빠져나가는 날이면

세상 있는 모든 욕을 끌고 와

저주를 퍼부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억울한 마음이 짓무르고

삶이 수척해졌지만 신기하게

빚은 점점 야위어 갔다

몇 해 동안 빚을 다 갚고 나니

그제야 도망간 친구의 안부가 궁금했다

더 이상 빚이 빠져나가지 않는 통장과

세상 모든 욕과 저주는 할 일을 잃었다

더는 만날 일 없을 테지만 한동안 나는

네게 보내는 욕설과 저주의 힘으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이제 나는 원래 그렇게 살던 사람 같다

어느 순간 우린 둘 다 절망이었을 텐데

너는 그 많은 욕과 저주를 어떻게 견뎠을까

 

-제22회 고산 문학대상

 

 


 

김명기 시인(울진)

1969년 경북 울진 출생. 관동대 산업공학과 졸업. 2005년 계간지 「시평」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종점식당』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맛 칼럼집 『울진의 맛 세상을 만나다』 발간. 2005년 '문학나무'와 '시현실' 신인상. 제2회 작가정신 문학상, 제37회 만해문학상 수상. 현재 강원 작가회의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