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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윤이산 시인 / 아무것도 아닌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5.
윤이산 시인 / 아무것도 아닌

윤이산 시인 / 아무것도 아닌

 

 

한 원로 화가가 양귀비 보러 가자 했다

급조달한 함박꽃이 우스개를 싸왔다

우스개가 가속 페달을 밟았고

차창 밖 정물화가 속도에 튕겼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가볍고

강 물살은 빠른 날이었다

술병이 바닥날수록

꼭 채웠던 품위도 단추가 풀어졌다

높낮이가 자빠졌고

좌우가벌꿀처럼 엉겼다

때마침 명지바람이 불어

생초(生草)들이 다 드러눕고 그만,

할배의 손바닥이 함박꽃

섶 안으로 쫄딱 미끄러졌다

술이 과했다고,

작별 인사 대신 근심 한 장 내밀었더니

괜찮단다, 아무 일 아니란다

그냥, 쓸쓸한 손바닥이

가는 봄날 한번 쓰다듬은 것뿐이란다

노을을 싸들고 봄날 뒤편으로 뛰어가는 그녀

꽃이 아니라 약초*였다

아무것도아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그해 봄날이 지나갔다

 

* 함박꽃 뿌리는 약재로 쓰인다

 

 


 

 

윤이산 시인 / 공존(共存)

 

 

1

 

갈대들,

모진 비바람에도

쉬이 뽑히지 않는다

서로의 발목을 꼭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2

 

꺾어보면 속이 비어있는 갈대들,

몸을 비워야 뻘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비운 힘으로 너를 붙들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뽑혀 내동댕이쳐지면서 알았다

 

 


 

 

윤이산 시인 / 오랜 후에, 영영 오랜 후에라도

 

 

당신을 읽다가

한쪽 귀퉁이를 접어둔다

 

나를 당신에게 걸쳐둔 채

 

외출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밥을 먹고

돌아와 또 꿈을 꾸면서

 

접어 둔 쪽을 펼쳐

다시 읽는다

 

읽다가 접어두는 페이지는

점점 늘어나고

 

당신은 내게 너무 아득하고

나는 당신을 해독하는데 턱없이 서툴고

우리는 아직 그런 관계인 걸까

그렇다 치고,

 

여하간 나는

오늘도 당신의 한 귀퉁이에

불은 밑줄을 긋는다

 

남겨 둔 표식은

꽃 피울 자리를 매만져두는 일

 

가끔 당신을 덜어다 쓰기도 하는데

당신이 나를 얼마나 깊이 물들여놓았는지

내가 당신 행세를 할 때가 있다

 

나무도 간절히 가려운 자리에 움을 틔운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늘 한 발 늦는,

도착하면 파장罷場만 남아있는,

내겐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무모라고

매몰차게 당신을 닫아버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에게 나를 걸쳐두기로 한다

 

당신이 점점 내게로 옮겨와 무럽도록

마음이 가려워져서 당신이 내게 왈칵, 쏟아질지

 

생각이 간절하다면

어찌 꽃이 멀게 있겠는가*

 

오랜 후에,

영영 오랜 후에라도

 

*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 인(仁)이 멀리 있겠는가? 내가 인을 원하면, 인이 바로 이를 것이다." 논어 술이편 29장 변용.

 

 


 

 

윤이산 시인 / 길

 

 

죽음이간다죽음이죽음을따라간다죽음이죽음을끌고간다죽음이죽음을밀면서간다죽음이꼬리를물고간다떠밀려가던죽음이슬쩍,샛길로빠져버리자빈자리를향해액셀러레이터를밟는다간혹뒤집혀찌그러진죽음이새어나오기도한다죽음이죽음을향해서간다와이퍼로죽음을닦으며간다내비게이션의안내를받으며간다죽음끼리마주보며간다맞은편죽음이건너올까찐-한썬팅속에숨어서간다죽음에도착하기도전에갑자기죽음이벌떡,튀어나올까봐보험들고간다

 

 


 

 

윤이산 시인 / 아무도 꺼내가지 않는

 

 

슬기네 집은 현관문을 열어두고 산다

어머니가 공공근로 갈 때도

광훈이가 복지센터 공부 갈 때도

뇌병변장애 1급 슬기를 안에 둔 채

문을 잠그지 않고 닫아만 두고 간다

 

누가 누나를 데려가면 어쩌느냐고

걱정을 했더니

선생님도 안 가져가잖아요

광훈이 피식 웃으며 어둑한 실내를 향해

손끝으로 V자를 펴 보이고는 나가버린다

 

종일 열어 두어도 아무도 꺼내가지 않는,

 

슬기를 목욕시켜 눕혀 두고

보지도 못할 티브이나 켜 두고

현관문 손잡이를 몇 번이고 더 만지작거리다

나도 그냥 문을 밀어 두고 돌아선다

 

계란이 왔어요~ 계란~ 싱싱한 계란이 왔습니다~

 

내 불안을 떠밀며

빗장을 풀어 둔 허공 속으로

뜨거운 목청이 뛰어든다

 

 


 

 

윤이산 시인 / 별

 

 캄캄한 밤, 막차를 놓친 막막한 사람들의 정류장. 이 정류장은 높이 떠 있어 길의 세세한 정보가 잘 보인다. 외통수가 빠져나간 샛길의 속속들이까지 발칵, 드러난다. 이 정류장에 오래 앉아 있다보니 좀전 놓친 막차가 목적지에 안 내려 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디 그 길뿐인가. 노선을 변경할 기회를 얻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누구든지 앉았다 떠날 수 있는 정류장은 어느 방향으로도 열려있다 무엇보다 이 정류장은 곁이 생긴 듯, 겹을 걸친 듯 혼자 앉아 있어도 외롭거나 무섭지 않다. 차렵이불 한 장 같은 잠을 덮고 기대 누우면 아무데도 가지 않고 그냥 여기 눌러 앉고 싶어진다. 여기가 내 목적지고 종착지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가장 어두워졌을 때, 딸칵, 별이 켜졌다 굳은데가 생겼다.

 

 


 

 

윤이산 시인 / 가만 ㅡ스승

 

 

 모두 우르르 몰려나간 뒤, 불 끄고 문 닫고 돌아서는 맨 나중 사람의 가만한 손놀림처럼 비가 온다 가만 다녀가는 이 겨울비가 ‘첫’을 불러오고 싹을 틔우고 애채*를 키울 것이다

 

 가만, 나의 뒤를 닫아 주고 돌아서던 맨 나중 사람의 얼굴이 나를 열고 있다

 

* 애체: 나무에 새로 돋은 가지.

 

 


 

 

윤이산 시인 / 큼지막한 호주머니

 

 

큼지막한 호주머니 달린 옷이 좋다

메모지도 넣고 돋보기도 넣고

자전거도 넣고 여행도 넣고 휘파람도 넣고

달걀 한 꾸러미 넣어두면 저들끼리 알아서

다달이 월 수익 낼 것 같은 호주머니

 

칸마다 용도별로 수납하면

옷 한 벌로도 한 살림 차린 것 같은

그런 호주머니 달고 걸으면

가진 것 없어도/ 걸음걸음 실실 콧노래 새겠다

 

구멍 난 줄 모르고 실속을 넣어뒀다

덜렁 흘려 버려, 이 등신 싶은 적 한두 번 아니지만

호주머니 없는 옷을 입고 나설 때는

여윳돈 바닥난 것 같아, 숨을 데가 없는 것 같아

덜렁거리는 빈손이 안절부절못한다

 

언 손도 텅 빈 손도

언제나 군말 없이 받아 주던

내겐 최측근이었던 호주머니

땅에 묻고 돌아선다

 

이젠 더 넣을 것도 꺼낼 것도 없는

아버지

 

 


 

윤이산 시인

1961년 경북 경주 출생. 경주 문예대학 수료. 경주대 사회교육원 문창반 수료.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 2009년 《영주일보》신춘문예에 〈선물〉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물소리를 쬐다』. 계간 《문학청춘》 기획위원. '시in', '응시',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