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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태준 시인 / 내가 세지 못하는 것
내 어머니 동공에 별 빛을 들이며 고이는 눈물 손등을 때리시는 그 아픈 눈물의 말씀을 다 셀 수 없었네 하늘을 제치고 날아가는 기러기가족을 세는 것처럼 기러기가족 보내고 쓸쓸해 하는 별들을 세는 것처럼 지금 어두운 눈으로 보는 것은 아파트 주차장에 서 있는 자동차나 가로등 불켜진 창들
밤이 깊어도 나는 다 세지 못하네 누런 옛 사진 바깥에서 꽃밭 가에서 예쁘게 살아라 꽃같이 살아라 조막만한 손에 쥐어주신 말씀들을
감태준 시인 / 귀향(歸響)
서울역에서, 한번은 영등포 굴다리 밑에서 잠깐 스치고 흘러흘러 너를 다시 만났을 땐 눈이 오고, 그해도 저물었다 말이 없는 친구, 손에는 넝마줍기 삼 년에 절도이범(竊盜二犯), 기차표 한 장,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 불구(不具)의 조각달이 떠 있다. 되는 것은 안 되는 것뿐이라고 한없이 쓸쓸해 하는 네 얼굴에 눈은 날아가 앉고, 눈은 날아가 앉고, 우리는 타관 불빛을 맞으며 하룻밤 강소주에 혹한을 녹였다. 머리에 채 남은 눈을 떨면서, 살아도 곱게 살자 꽃같이 살자, 흩어진 마음을 챙겨들고, 우리는 갈라섰다. 끝없이 몰리고 풀리는 행렬속으로, 너는 이제 기적소리에도 가볍게 떠밀리고, 떠밀리는 너의 등에서, 아니, 너의 물결소리가 들리는 머리 위 공간(空間)에서, 나는 그때 새들의 고향을 얼핏 보았다
감태준 시인 / 달래의 자정(子正)
열 아홉 생전(生前), 넝마진(塵)에서 품팔아 별을 헬 줄은, 청량리 3번지(三番地)에서 분분히 밀리는 안개 속 냉돌 위에서, 속곳 찢기고 내내 부끄러운 내 1년(一年), 꽃 엮어 짜올린 꿈 치렁치렁 머리에 땋고 집 떠난 지도 1년(一年), 세상의 희고 검은 손들은 알게 모르게 건너와 내 어릴 때 되고 싶었던 새들을 후려가고, 토담집 엄니 엄니 울엄니는 깨 터는 밤에, 산골 깨밭을 매다 버린 호밋날로 안개를 맬 줄은, 다시 한번, 막다른 골목 한가운데 날아온 돌 되던지면 거기, 그러나 무섭도록 고요한 파문(波紋), 죄없는 골목만 집들 사이에 갇혀 있다.
감태준 시인 / 부용잔상
부용이 다 졌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눈 내리는 저 천변에서 여름 며칠 연분홍 꽃으로 살았을 뿐 큰 비에 뿌리째 뽑히고 말았지만 두 눈에 박힌 형상 그 여름 한창때 얼굴 지워지지 않는 한 당신이 다 갔다고 생각할 수 없듯이
-한국시인협회 사화집 『꽃 (2020. 12. 동학사)
감태준 시인 / 추어탕
사랑을 보내고 앓아도 배고프고 눈앞이 캄캄해도 시뻘겋게 해 뜨는 이치 감국화야 너도 알지? 찔레 덤불 마음속은 못 걷고 화왕산 십 리 억새 길 걷던 날
농가 밥집 마당에 배고파 나타난 이 사람 평상에 앉아 추어탕 시켜 먹던 그 남자
감국화야 너도 기억하지? 찔레 가시 돋은 혓바닥 추어탕에 입맛 얻고 나서야
비로소 널 쳐다보던 나를
널 쳐다보고 백세주 한 병 시켜 반주하던 나를 감국화야 너도 알지? 사랑을 보내고 앓아도 놀은 붉게 타 번지고
눈앞이 캄캄해도 배는 고프고
그 농가 할머니 손맛 생각하면 사랑은 뒤끝이 슬퍼서 쓰네 추어탕은 속을 데워 쓴 옛일을 달래네
감태준 시인 / 사모곡
어머니는 죽어서 달이 되었다
바람에게도 가지 않고
길 밖에도 가지 않고,
어머니는 달이 되어
나와 함께 긴 밤을 멀리 걸었다
-『동아일보/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2023.03.18
감태준 시인 / 주먹을 풀 때가 되었다
주먹을 불끈 쥐면 돌이 되었다 부르르 떨면 더 단단해졌다
주먹 쥔 손으로는 티끌을 주울 수 없고 누구한테 꽃을 달아줄 수도 없다
꽃을 달아주고 싶은 시인이 있었다
산벚꽃 피었다 가고 낙엽이 흰 눈을 덮고 잠든 뒤에도 깨지지 않는 응어리
털고 말자, 지나가지 않은 생生도 터는데.
나무들 모두 팔 쳐들고 손 흔드는 숲에서 나무 마음을 읽는다 주먹을 풀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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