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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림 시인 / 나의 싸움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신현림 시인 / 가족
왜 집이 자주 황량한 장독이어야 하죠
장독 한 채에 온 식구 쌓아넣고 해 뜨는 땅으로 아버지는 떠났다 매일 파산만 하고 돌아온 아버지 다시 해를 가지러 떠났고 홀로 감자알 같은 자식을 다스리는 어머니 노을 지는 강이 되고 토막난 갈치가 되어 은비늘 날개를 털며 밤상 위에서 서럽게 웃고 계셨다 자식들의 언덕, 그 가파른 혹을 오르내리셨다
풍운의 아버지, 장독이 깨질 것 같아요 쓰러지세요 해 뜨는 땅이란 없나 봅니다 저희들이 해가 돼드릴게요 뜨끈뜨끈한 밥덩이가 될게요 어머니의 정글이 고통의 톱날에 마구 베어집니다 추워요 무서워요 다신 떠나지 마세요
신현림 시인 / 활짝 핀 살코기의 공허함을 아세요?
결혼해서 애를 낳아봐야 인생을 안다구요? 당신은 인생 좀 아세요? 고독과 슬픔의 최전방지대를 지나가보셨나요? 활짝 핀 살코기의 공허함을 아세요? 그래요. 남편과 아이는 잘하면 피난처고 복지국가죠 저라고 남편이란 해시계가 그립지 않겠어요 그래요. 저도 상상임신을 하지요 그럴 때면 아랫배에서 사이렌이 무섭게 울려요 종잡을 수 없는 인생이기에 불안하고 두렵군요 그래요. 끓인 밥마다 후회의 누룽지가 엉겨붙구요 그래요. 흰 장갑 낀 손들이 저를 따라다녀요 철컥, 치욕의 수갑이 제 손을 채웠어요 철컥, 치욕의 수갑이 제 목을 졸라요 욕망의 갈코리도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이 괴로운 살코기를 석방시켜 주시든지 오래 기댈 수 있게 당신 어깨를 빌려주시든지 제 눈은 또 오염된 바다예요 원 이래서야 세상 깨끗해지겠습니까 쓰레기만 불리고 인생께 미안한 마음 뿐입니다 죄송하지만 샌드페이퍼 같은 당신 혀로 제 눈깔 핥아주시고 물고기며 해초며 어선 한 척 띄워 살벌하게라도 웃게 해주세요 애국가가 울려퍼지면 한 번만이라도 크게 울게 두 눈을 쑤셔주세요 제 몸에 뿌리박힌 절망한 자들을 뽑아 잠재우고 죄란 죄 면죄부로 가려주시고 악몽과 불면의 고문실을 폐쇄시켜 주세요 아니면 낙동강에 저를 던지세요 가져가세요 절 좀 가져가세요 제발!
신현림 시인 / 나의 시
나의 시는 오르는 물가를 잠재우지 못하고 병든 자의 위로도 못 되고 뜨거운 희망을 일깨우는 망치소리도 못 되고 네 상처의 주름살도 지우지 못하고 그래, 아무 힘도 못 되지
그래도 날 여류시인이라 부르진 마 여류가 뭐야? 이쑤시개야, 악세사리야? 여류는 화류란 말의 사촌 같으니 여자라는 울타리에 가두지 마 폄하하지 마
세상을 향해 품을 열어놓고 나는 돌아본다 뭣보다 진하게 느끼는 세기말을 도시의 우울과 슬픈 열정의 그림자를
사람의 욕망과 쓸쓸함을 솔직하게 비춰내고자 괴로움을 넘고자 내 노래는 출렁인다 거침없이 일렁이며 흘러가고자
사무치는 아리랑처럼 격정의 록처럼 푸른한 재즈, 블루스처럼
신현림 시인 / 내 마음 속 보리알 하나
헤어져도 헤어지지 않은 것 같아 네가 날 지켜보거든 네 시선은 나를 비추는 플래쉬 어딜 가든 플래쉬 불빛이 긴 융단처럼 펼쳐지거든 어딜 가든 네 생각이 나거든 내 주머니에 넣어준 사탕 하나 내 마음에 넣어준 빛의 보리알 하나 내 눈동자에 그려준 바다 하나
바다가 푸른 건 세상이 우울하기 때문이랬지 하늘이 푸른 건 그래도 삶이 살 만하기 때문이랬지
네가 그리우면 어떡하지 그리운 내 마음은 진흙땅처럼 질퍽하지 네 마음의 뻘에 내 발이 푹푹 빠지고 있어
잊지 못할 거야 잊지 않을 거야 네 사랑으로 자신감을 얻었어 살아가는 이유를 얻었어
신현림 시인 / 상처
마음은 상처로 만든 영화이든가 한편의 마음엔 우박 같은 분노, 욕설을 삭이면서 우울의 피고름을 흘리면서 집착의 담쟁이덩굴은 온 마음을 덮고 고독의 움막 속에 사랑과 이별의 뜬구름을 싣고 배반과 애증의 교차로를 지나 욕망의 빙산은 달리고 슬픔이란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잦은 실패 치욕..... 가장 큰 상처는 죽음의 밀렵꾼이 호시탐탐 노리는 것
아, 살기 등등한 모자이크로다 상처만 클로즈업하니 관 속에서 숨쉬는 것 같구나
신현림 시인 /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나뽈레옹의 이 말은 10년 동안 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송곳이었다 게으름을 피울 때마다 내 많은 실패를 돌아볼 때마다 송곳은 가차없이 찌르고 찔러왔다
모든 불행엔 충고의 송곳이 있다 자만치 말라는, 마음 낮춰 살라는 송곳 불행의 우물을 잘 들여다보라는 송곳 바닥까지 떨어져서 다시 솟아오르는 햇살의 송곳
송곳은 이제 지팡이처럼 내게 다가와 신들린 듯 거친 바다처럼 밀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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