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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남진 시인 / 아버지의 끈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4.
전남진 시인 / 아버지의 끈

전남진 시인 / 아버지의 끈

 

 

태풍이 온다고

아버지는 고추밭으로 나가셨다

너무 많이 달아 지주목으로 받쳐진 고추나무를

다시 말뚝을 박아 끈으로 맨다

약간의 바람과 먹구름에도

고추나무는 몸을 크게 흔든다

흔들리수록 아버지의 끈엔 힘이 들어간다

좀 더 꽉 매어달라고

바람보다 더 크게 움직이는 고추나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넘어진 놈은

끈으로 끌어올린다

부상병처럼 일어나는 고추나무

묶기를 마친 아버지의 불안한 눈이

다시 고추밭으로 나간다

할 수만 있다면

온몸으로라도 태풍을 막아주고 싶을 것이다

내가 저 고추나무였을 때

아버지가 항상 내 옆에 계셨을 때

난 그것이 태풍인 줄 몰랐다

지금껏 나를 잡고 있었던 것이

아버지의 끈일 줄 몰랐다

 

 


 

 

전남진 시인 / 마지막집

 

 

 이 길 끝에 집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네. 집을 떠날 때 밝은 아침이면 좋듯 돌아갈 땐 아주 어두운 밤이라도 좋지. 창 밝힌 집, 밤공기에 숨어, 숨은 냄새에도 추억은 있지. 이제 집에 닿아 불빛 환한 방문을 열면, 거기 지나버린 시간이 고스란히 기다리고 있다면, 그렇다면, 흙 마르는 냄새, 불빛보다 먼저 나오고, 사람들의 웃는 얼굴이 그때처럼 나를 본다면, 그렇다면, 익숙한 높이로 몸을 낮춰 방으로 들어가 늘 앉던 자리, 하얗게 쌓인 시간 위에 앉아, 떠난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겠지. 불을 끄면 별과 달빛으로 밝혀지는 방문, 세상은 다시 그때처럼 방을 향해 불을 밝히겠지.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슬퍼도 슬프다고 말하지 않는 마음

 안과 밖, 경계 사라진 한없이 넓은 마음에

 그리움이라 해도 좋을 것들을 그 하나를 잃어버리고

 혼자 돌아와 눕는 내 마지막 집이여

 이 길 끝에 집이 있어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네.

 

 


 

 

전남진 시인 / 월요일은 슬프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오전 열 시 이십칠분의 햇살은 오전만큼의 기울어진 그림자를 만들고

내 그림자도 그 기울기로 천천히 기울다 어느 기울기에서 사라지면

그 때서야 나는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그런 나는 화장실에 앉아 오늘이 월요일이란 사실에 놀라며

내가 앉아있는 이 곳에서 내 생은 짧게 혹은 느리게

그러나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내가 꿈꾸지 않은 모습으로 쉴새없이 진행하고 있는 것인데

어떤 저항도 소용없는 이 지독한 시간의 레일 위를 달려

지하철에서 쏟아져나와 다시 되돌아갈 길을 걸어오지 않았던가

지독히 짧은 하루 동안의 휴식에도 나는 일주일만큼의 자유를 느끼려 했던 것일까

일주일을 보상받으려 내 휴식은 그렇게 발버둥쳤던 것일까

그렇다면 내 생의 월요일은 내 생의 일요일만큼의 숫자로

일요일의 자유를 무참하게 부셔내는 그 모진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인데

같은 숫자의 자유로도 나는 월요일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또, 오늘이 월요일이란 사실에, 나는

지난 날 애인을 잊듯, 싱싱했던 그 연애를 잊듯, 매정했던 결별을 잊듯

그렇게 일요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다시 월요일에 감금되어 슬픈 현재를 감내하고 있는 것인데

그래도 나는 생각한다, 내 일생이 이렇듯 일요일에 마약처럼 취했다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약을 구하기 위해 월요일에게 손을 내밀어

가련한 얼굴로 또한 며칠을 버티게 되더라도, 일요일은 내게 위대하였다고

 

 


 

 

전남진 시인 / 사북에서

 

 

먼지바람이 훅 불어왔다

여자는 문을 열다 말고 기침을한다

기침소리가 길 건너편까지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도시의 공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는

담배를 꺼내다 말고 코를 만진다

・・・너무 낡아 있군・・・

라이터가 불을 쏘아 올린다

담배에 불을 붙인 불꽃이 라이터 속으로 사라진다

질척이는 골목을 걸어나오느라 신발이 젖어 있다

사내는 발 아래 기울어진 도시를 바라본다

가파른 산을 오르며 힘겹게 도시를 떠나는 자동차들

검은 매연이 뿜어져 나온다

이 도시를 떠나는 것들은 왜 검은 흔적을 남겨 놓을까

사내는 다시 고개를 들어 도시를 내려다본다

담배연기가 찢어지듯 흩어져 하늘에 섞인다

・・・그렇게 먼 과거는 아니었지・・・

여자는 낡은 베니어 문을 드르륵 닫는다

사내는 생각한다, 저렇게 닫아버려야 좋았을 것들을

잿빛 슬레이트 지붕을 쓸고온 바람이

사내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고 지나간다

삭아내린 폐가의 파편이 부랑자처럼 도시를 떠돌고

・・・여기서는 죽을 수조차 없다니・・・

사내의 손가락이 담배를 튕겨 올린다

조명탄처럼 도시로 떨어지는 담배, 사내는

다시 코를 만지며 길바닥에 침을 뱉는다

둥글게 말리는 침에 먼지가 옯겨붙고

도시는 다시 먼지에 갇힌다

숨만 쉬어도 병이 되던 때가 있었다는 듯이

서는 곳마다 벼랑이던때가 있었다는 듯이

 

 


 

 

전남진 시인 / 과일장수 원인호

 

 

 얼마 전 읍 단위 시골에 사는 동생 친구로부터 전화가왔다. 나보다 두 살 어린 그는 스무살 즈음 다니던 대구의 프레스공장에서 오른손 검지 하나를 절단기에 잘려, 악수를 할 때마다 뭉툭한 흉터가 내 손바닥을 지그시 눌러왔었는데, 처음엔 그것이 마음까지 눌러 아프더니, 어느 날부턴가 상처를 에워싼 거무스레한 굳은살의 뭉툭한 느낌을 뚫고 자라난 듯 보이지 않는 어떤 손가락이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져 다정했다. 검지를 대신해 중지가 잡은 볼펜이 과일 이름이며 값을 쓱쓱 써내려갈 때, 여문 자리가 볼펜을 턱 받치고 있는 것이, 중지가 제 할 몫도 아닌 것을 덕분에 하게 되 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명절, 파장난과일 공판장에서 고기 구워 술잔 돌리다 팔던 수박이며 참외를 손으로 짝짝 짜개 안주삼을 때, 그 과일도 제 속 으로 들어오는 어떤 손가락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그런 술자리마저 몇 년간 하지 못하던 차에 회사로 전화를 걸어온 것인데 어찌 사시느냐, 아직 그 회사 다니시느냐, 자식 늘어 살기 수월치 않을 텐데... 그런저런 안부 끝에 한 안부가 붕대 푼 손 처음 잡아 악수하던 그날처럼 마음을 또 지그시 눌러왔는데 형님, 남는 것도 없는 서울서 뭐 그리 아득바득 삽니까. 내 밀어줄 테니 내려와서 과일장사나 하며 설렁설렁 삽시다. 그래 어찌 나도 네가 밀어주는 과일 리어카 끌며 스리슬쩍 살고싶지 않을까. 인호야 우리 딱 한 번은 그렇게 살아보자. 그리고 죽어도 죽자.

 

 


 

 

전남진 시인 / 소나기

 

 

산 아래로 길이 내려온다

눈동자에 길 새겨진다

휘어져 어깨에 감긴다

눈을 감아 길을 끊는다

아주 잠시, 그리고

작게 네 이름을 부른다

그 이름 쓸쓸함에 젖는다

 

너를 부정한 만큼 나는 아팠다

생각을 지우려

엉뚱한 추억의 담장들을 넘어다녔다

그때마다

송글송글 네 얼굴 솟아나

물든 나뭇잎처럼 떨어졌다

 

그렇게 너를 지우고 간 이별처럼

꽃을 지우며 가을이 가고

사랑한다며

팔을 툭 치고 달아나는 소녀처럼

네 마음에도 어디쯤 오래된 길 하나 뛰어가겠지

 

지난날 내 비겁함이

오늘은 종일 구름으로 글썽이다

때늦은 후회처럼 비 내린다

두둑두둑 산이 부러지고

길이 거칠게 튀어 오른다

피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다고

함부로 뛰어가는 신발에 꽃잎이 묻어왔다

가을이 끝나는 길,

네 마음에 묻는 내가

비를 피해 뛰어가고 있었다.

 

 


 

 

전남진 시인 / 얼굴을 잊은 친구를 위하여

 

 

여행을 좋아했지만 난

결혼을 하며 집을 떠나는 일이 귀찮아졌다

낯선 도시의 외로움도

처음 만나는 풍경의 거친 눈빛도

길 위에 걸치는 배고품도

끈질기게 달라붙는 방향 감각도

혼자 앉은 식탁도

모르는 사람들의 불편한 눈빛도

더는 나를 불러내지 못했다

 

침대는 밤에 갇히는 감옥

저녁이 오면 집으로 돌아가려는 나를 나는

한동안 경멸했다

집은 밤을 가둔 감옥

스스로 감옥으로 걸어가는 나를 나는

한동안 용서하지 못했다

 

그러나 친구여

내가 어떻게 그대를 잊겠는가

길을 기억하는 낡은 구두와 낯선 공기로 가득한 지도를

필름이 남은 카메라와

비밀을 조금식 담아놓은 배낭을 나는 아직 버리지 않았다네

바람이 창고의 먼지를 날려 오래된 지도를 펼치면

친구여, 난 그대가 내게로 남겨둔 길을 따라

바닥이 닳은 구두와 함께 떠날 것이네

 

그러나 친구여

아직은 창고를 열 수 없다네

가족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밤을 나는 이길 수 없다네

저녁이 오면

허기진 얼굴로 몽유병자처럼 가족에게 돌아가려는 나를

아직은 이길 수 없다네

 

쓸쓸한 밤이 찾아와 어디 낯선 길 오래된 여인숙에 홀로 들거든

친구여, 나를 기억해주게

그대 옆자리 빈 베개에 내 영혼이 따라와 있다는 것을

 

 


 

 

전남진 시인 / 현수막

 

 

찢어진 현수막이

쇠파이프 기둥에 묶여 있다.

흰색 나일론 로프가

둘둘 말린 현수막을 칭칭 감고 있다

구호를 품은 현수막

말을 묶인 현수막

바람이 불자

끄트머리 천을 맹렬하게 흔든다

제발 풀어달라고

할말이 있다고.

 

 


 

 

전남진 시인 / 얼굴을 잊은 친구를 위하여

 

 

여행을 좋아했지만 난

결혼을 하며 집을 떠나는 일이 귀찮아졌다

낯선 도시의 외로움도

처음 만나는 풍경의 거친 눈빛도

길 위에 걸치는 배고품도

끈질기게 달라붙는 방향 감각도

혼자 앉은 식탁도

모르는 사람들의 불편한 눈빛도

더는 나를 불러내지 못했다

 

침대는 밤에 갇히는 감옥

저녁이 오면 집으로 돌아가려는 나를 나는

한동안 경멸했다

집은 밤을 가둔 감옥

스스로 감옥으로 걸어가는 나를 나는

한동안 용서하지 못했다

 

그러나 친구여

내가 어떻게 그대를 잊겠는가

길을 기억하는 낡은 구두와 낯선 공기로 가득한 지도를

필름이 남은 카메라와

비밀을 조금식 담아놓은 배낭을 나는 아직 버리지 않았다네

바람이 창고의 먼지를 날려 오래된 지도를 펼치면

친구여, 난 그대가 내게로 남겨둔 길을 따라

바닥이 닳은 구두와 함께 떠날 것이네

 

그러나 친구여

아직은 창고를 열 수 없다네

가족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밤을 나는 이길 수 없다네

저녁이 오면

허기진 얼굴로 몽유병자처럼 가족에게 돌아가려는 나를

아직은 이길 수 없다네

 

쓸쓸한 밤이 찾아와 어디 낯선 길 오래된 여인숙에 홀로 들거든

친구여, 나를 기억해주게

그대 옆자리 빈 베개에 내 영혼이 따라와 있다는 것을

 

 


 

전남진 시인

1966년 경북 칠곡 출생.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한일건설 홍보팀 재직중. 1999년 <문학동네> 문예공모 詩 당선. 시집 <나는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