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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길 시인 / 거울 속의 나
달빛 낮게 깔리는 밤 검은 고양이의 수염 끝으로 풋별 하나 깨어나고 있다 내려앉은 하늘방으로 서리꽃 피는 하루를 거둘 때면 의식을 곤두세우는 작은 벽거울 속에 쓰러지는 내가 있다 뼈아픈 겨울바람으로 흩어진 새벽 신문의 온기와 일기의 쓰다만 여백이 영혼의 먼지를 가라앉힌다 이윽고 어둠을 밀치고 일어나는 검은 고양이에게 잔별들은 소나기처럼 빛을 쏟아 내린다한 발자욱씩 야웅거리는 사랑이 가까워지고 어둡고 거칠은 유배의 세상이 두렵다 먹다 만 라면 몇 가닥만이 몇 구절 거짓시처럼 불어터져 한가하게 널브러진 구석방에서 얼룩처럼 적힌 거울 속의 내 이름을 지운다
-시집 <철길이 희망하는 것은>에서
문창길 시인 / 무등을 타던 아이
너의 작은 주먹손을 감싸쥐면 동트는 아침 태양처럼 어느덧 초라한 애비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 오르는 구나 구멍가게 앞을 오가며 아이스크림을 빨아 대던 너의 해맑은 가슴에 알 수 없는 총알이 무참히도 박혔을 때 도청 담장의 장미꽃은 더욱 무성히도 피어 제꼈지 나라의 파란 하늘이 그 빛으로 물들 때 마냥 피어 오르던 오월 어린 꿈들을 무심히 짓밟던 오 군화여, 총뿌리여 사랑하는 조국이여 무등의 나무들이 움추리고 전라의 너른 들꽃들이 휘둥그래 눈을 감는 우리들의 놀란 저녁 초롱한 별들만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구나
문창길 시인 / 랑군의 꽃 파는 소녀
랑군시 쉐다곤파고다 앞 꽃 파는 소녀에게 간절한 시선을 쏟아 부으며 다가갔다 기어이 가까이 다가가 사랑을 고백하고 싶었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꽃의 경전을 읽으며 꽃을 파는 평화의 천사 랑군소녀 좌판에 펼쳐진 꽃들의 수다에도 픽션스토리 삼매경에 빠진 표정이 신비하기 이를 데 없다
누가 살까 저 수다스런 꽃들 꽃을 팔아서 일용할 양식 살까 팔리면 부처님께 자비롭게 보시를 할까 아 무언의 저 소녀 자신이 팔고 있는 꽃과는 전혀 상관없는 듯 길 위에 가부좌 틀고 앉아 선정에 든지 한참이다
나는 저 꽃 파는 소녀를 사랑한다 나는 꽃을 팔면서 꽃의 경전을 읽는 저 소녀를 사랑한다 뾰족탑 아래 심오한 절간의 부처님 보다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길을 맨발로 걷는 빨간승복의 버마스님보다 더 신묘한 득도의 길에 들어선 소녀보살을 나홀로 짝사랑 한다 이윽고 중천에 떠오른 버마태양이 달큰한 빛살들을 들뜬 내 속가슴에 사정없이 쏘아댄다 그러나 어쩌란 말이냐 내가 도저히 다가설 수 없는 저 숭고하게 꽃을 파는 랑군소녀를 꽃을 팔면서 경전 삼매경에 빠져든 저 소녀보살을 그저 짝사랑에 빠질 뿐
나는 기억하리라 또는 영원히 짝사랑하리라 궁휼한 시대 부처님의 속살을 훑고 있는 저 꽃파는 소녀보살을
문창길 시인 / 민들레 1
땅이 풀리고 그대의 가슴 열리면 꿋꿋이 뿌리 박은 사랑으로 푸르게 푸르게 그 자리에서 살아나는 들꽃 한 송이 뜨거운 바람이 동에서 서으로 서에서 동으로 들녘의 어진 것들을 깨우며 지날 때 여리게 흔들리는 꽃잎꽃잎꽃잎 그대여 사랑은 쉽게 이별하는 것 또는 쉽게 타오르는 것 그저 커다란 모양도 없이 아름답고 맑은 향기도 없이 처절한 그대의 푸른 몸을 부비며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망연히 흔들리는 기쁨으로 피어나는 것
문창길 시인 / 민들레 2
아 깊게 뿌리박은 들꽃이여 그 당당한 이름이여 뜨겁게 다가오는 햇살을 그대 푸른 가슴에 거침없이 끌어안는 사랑으로 일어 서거라 거센 바람이 몰아쳐도 거친 눈보라가 닥쳐도 오직 앙가슴 하나로 영원 하여라 새날 새롭게 잎을 가꾸고 꽃을 피우는 희망세상을 꿈꾸며 지난 동면의 어둠을 헤치고 홀씨로 떠오르는 가벼운 절정을 느끼리라
문창길 시인 / 한강에게
대동나루에 몸 풀리면 옥이의 종이배는 둥둥 다시 뜰 수 있을지 따뜻한 남쪽나라 서울로 아버지를 따라 가버린 옥이 가시내의 가슴에도 진달래 피는 봄은 다시 올 수 있을지 이별하는 슬픔만큼 그리움만 가득 싣고 강물은 말없이 푸르게 남으로 흐르고 있다 한강이여 그대에게 전하노니 이 강물이 풀려서 동해로 서해로 흘러 그대 푸른 가슴을 적신다면 따뜻한 남쪽 서울 그대 타는 가슴을 적신다면 옥이 가시내의 꿈처럼 희망처럼 온몸에 뜨거운 피 흘러들겠지
문창길 시인 / 금정아 봉화야 내 딸들아 - 고양군 금정굴양민학살 희생자들의 목소리 금정아 봉화야 내 눈에 박혀도 마냥 어여쁜 딸년들아 너희가 왔구나 들국 피는 들길을 지나 싸리꽃 떨어지는 가을 산길을 따라 붉은 황톳길을 딛고 너희가 왔구나 너무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거라 우리가 죽은 건 죽은 게 아니란다 저 계곡을 따라 말없이 흐르는 푸른 물줄기의 역사란다 금정아 봉화야 내 딸들아 누가 이 몸을 죽었다 하드냐 누가 이 영혼을 죽은 영혼이라 하드냐 우리는 죽은 게 아니고 그저 청청히 살아있는 너희들의 애비임을 너희들의 에미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너희들의 오래비와 누이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저 높은 가을하늘 푸르게 서려있는 나라의 역사임을 알아야 한다 금정아 봉화야 내 딸들아 우리의 부역은 부역이 아니었다 그저 굶주린 승냥이처럼 달려드는 국방군이나 치안대나 태극단 모두에게 한 술의 밥을 끓이고 한 잔의 술을 건네며 한 지붕 하늘아래 따뜻이 정붙이며 살아가는 삼촌이거나 성님이거나 누이이거나 아줌씨거나 아제임을 아 그래 그저 한민족임을 또는 한겨레임을 그래서 다들 끌어안고 살아야하는 인지상정이었을 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누가 우리를 빨갱이라 하드냐 누가 우리를 부역자라 하드냐 저 산 밑을 보아라 심산한 낮바람에 흔들리고 야심한 밤바람에 흔들리는 무더기 무더기 들꽃으로 사는 순박쟁이들이었다 어울렁 더울렁 농투사니로 살아가는 산무지렁이 그래 산무지렁이었다 그 것 뿐이었다 금정아 봉화야 내 딸년들아 마냥 슬퍼만 말거라 마냥 노여워만 말거라 너희 발밑에 백골이 푸른 넋으로 살아나고 있나니 너희 앞날에 허울좋은 이념이건 사상이건 걷어치우고 이 나라의 푸른 역사를 지켜가야 하리니 또는 말없이 지켜온 우리의 진실한 영혼을 기억해야 하리니 저 갈참나무의 마지막 이파리가 떨어질 때까지 모든 진실된 것들을 끝까지 지켜내야 하리니 이렇게 이쁜 들국화로 산국화로 피어난 내 딸년들아 잊지 말거라 이 애비 에미는 늘 푸르고 청청한 나라의 역사이고 희망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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