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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강 시인 / 산다는 것
팔만사천경전 머리에 이고 예수님 십자가 양손에 들고 공자님 모습처럼 세상 나와 보니 바람 부는 대로 내 코는 야누스로 변한다
백년도 못 지킬 우리네 몸 청솔같은 절개로 사람 되는 게 꿈이건만 마음 방엔 웅크린 도둑이 있고
가시보다 더 독한 시새움이 자라고 빨간 머리 수건을 쓴 막달라 마리아가 있다
그래! 알고 보면 사는게 참 어려워 잘 산다는 게, 바르게 산다는 게 유혹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는 게
김정강 시인 / 가을이 아름다운건
구절초, 마타리, 쑥부쟁이꽃으로 피었기 때문이다 그리운 이름이 그리운 얼굴이
봄 여름 헤매이던 연서들이 가난한 가슴에 닿아 열매로도 익어갈 때 몇몇은 하마 낙엽이 되었으리라
온종일 망설이던 수화기를 들면 긴 신호음으로 달려온 그대를 보내듯 끊었던 애잔함 뒹구는 낙엽이여
아, 가슴의 현이란 현 모두 열어 귀뚜리의 선율로 울어도 좋을 가을이 진정 아름아운 건 눈물 가득 고여오는 그대가 있기 때문이리
김정강 시인 / 시래기처럼 마르고 있다
詩가 없다면 삶은 얼마나 삭막할까 세상의 모든 언어를 압축한 한 음절의 어휘가 있다면 꽃이라 한다.
꽃이란 잎이 변한 생식기관이란 생물학적 이미지 보다는 사랑의 은유적 언어요 가치와 보람 삶과 죽음, 위로와 평화, 이상과 현실, 생명의 절정, 영원한 환생이란 미학적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강물에 몸을 던졌지만 희디흰 붕대를 끌고 가슴은 청동의 녹 목숨이 시래기처럼 마르고
시인에게 꽃은 인생을 수식하는 배경인 동시에 추구해야 할 이상이며 이루고 싶은 꿈의 모습이지만 무조건적인 이상의 추구만이 아니라 기다림과 눈물의 과정을 통해 꽃을 바라본다.
역학적인 관점에서 푸른색(동/春)은 소생과 사랑, 붉은색(남/夏)은 출산과 부활 흰색(서/秋)은 반성을 황색(土)은 관용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울 엄니 저고리 보랏빛 오동꽃 하늘빛 닮은 도라지꽃 붉고 희게 피는 연꽃 시인은 계절별로 세 가지 꽃을 피어주며 사람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의 절정을 노래한다. 시인이 계절에 대한 관심은 생명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다. 꽃의 과정이 없다면 씨를 통한 부활은 기대할 수 없겠다. 죽음은 우리의 의식 밖의 범주이므로 언급하지 않는다 공간에 적용되는 원근법을 시간에 적용하면 그리운 과거는 시간의 강물 저편에 보여진다.
꽃(사랑) 과 시래기( 반성)를 대조시켜 목숨이 마르는 시련을 통해 인생의 깊은 맛을 알 수 있는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주고 있으며 사랑에서 오는 외로움과 슬픔을 독자와 함께 공유하고 싶은 시인의 미학이 있는 것 같다.
김정강 시인 / 신랑각시
태어난 부모 틀리니 성도 다르고
자란 텃밭 다르니 성격도 각각
때로는 옥신각신 그래도 신랑각시
한 핏줄 형제보다 정은 더 깊어
도란도란 동짓밤 눈이 쌓이네
김정강 시인 / 계림에 와서
천년 불꽃의 솔바람 타고 에밀레 혼 꽃씨처럼 흩어진다
아사녀 그린 듯 고운 눈썹 등 굽은 할머니 첨성대 돌아 반월성 너머 은비녀로 뜨면
달빛 징소리 일어서는 대숲소리 땅을 디디면 차마 밟을 수 없는 놋그릇 청동그릇 살 부딪는 소리
바람은 불어 땅 끝에 머물고 물은 흘러 하늘에 출렁이는 빛은 한 줄기 부서지고 있었다
김정강 시인 / 차를 마시며
연한 풀물이 몸을 푼 찻잔 가득 가을 하늘이 내려와 있다 창가에 서니 빈들을 홀로 가는 사람이 보인다 영원한 떠남이란 어둡고 푸른 강물 찻잔에 비치는 구름 같은 것 나는 기침하는 나무가 되어 사념의 비늘을 떨구는데 이 가을엔 그리운 이의 외로움을 나눠 갖고 싶다
김정강 시인 /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은
얼마만큼 사랑하느냐고 묻지 않겠어요 이만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을래요 같은 시공에서 만난 것을 아파할 만큼 소중해할 뿐 사랑이라는 이름의 면류관 하나 씌워 그대 묶지 않으렵니다
다만 그대 날개 지쳐 앉을 즈음 두 손 모아 꽃 한 송이 바치고자 하는 마음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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