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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영림 시인 / 달팽이의 길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4.
이영림 시인 / 달팽이의 길

이영림 시인 / 달팽이의 길

 

 

숨은 숲길에 더듬이 세워

쉬엄쉬엄 주위를 살피며 가는 시인이다

나뭇잎도 기웃대고

작은 풀꽃과 눈길을 맞추고

개미와 잠시 더듬이 악수를 건넨다

 

기어오르다 툭 떨어지면

다시 또 다시 오르고

가다 막히면

쉼 없이 되돌아가는 느림의 필력

 

고달프고 힘들어도

묵묵히 내일을 향해 가는 그 길

달팽이는 서두르지 않는다

천천히

한 번 기웃대고 한 번 더 생각한다

 

길목마다 시를 쓰는

달팽이시인이다

 

 


 

 

이영림 시인 / 사랑니의 방

 

 

한쪽이 비어야 한다 지그시 눌러보는 공간과 공간 사이 뜨거운 것들은 위로 오르려는 습성이 있어 불꽃은 활활 타오르며 날개를 가진다 비로소 새가 되는 것이다 희뿌연 연기와 회 덧칠에 갇힌 겨울은 몸을 뒤척여 온도를 만지기 시작했다 화덕은 공손하게 입안을 드러낸다

 

사각의 프레임이 벽에 걸려있다 테두리부터 고요해지는 건 사각입니다 비상하려면 뜨거움이 필요하지요, 불같은 것 말입니다 목구멍을 막는 포르말린 위로 신경다발이 외마디를 지른다 우리는 필요 없어요 과감하게 잘라낼 수밖에요 메케한 냄새 뒤로 감수성의 허연 뿌리가 뽑힌다 의사는 말없이 날아간 불을 기록한다

 

치 익 밥물 오르는 소리와 지글지글 찌개 끓는 소리가 궁벽의 공간에 가닿는다 내다버린 것들이 제자리로 갔을까 사각의 흔적을 두고 온 막다른 곳에 천공(天空)의 고요가 걸린다 저변이 뾰족한 곳은 침묵 같은 공간이다 하나를 버리고 또 다른 하나를 가지는 것은 타오르는 법칙 중의 하나이다 새하얀 쌀밥이 빈방에 구수하다 한달음에 올라가 버린 아궁이 벽에 날개가 덤으로 그려졌다

 

 


 

 

이영림 시인 / 태양초의 온도

 

 

 여름, 물관은 초록으로 보풀이 일었다, 한 겹 빙 두른다

 

 관으로 스민 온도와 나간 온도로 색이 칠해진다, 절박한 오차로 물들어지는 계절들 초록은 서늘하게 치마를 끌며 어제를 말했다 나지막한 평화와 고마운 마음이 풋풋한 어린아이와도 같다

 

발길로 솎아진 밭길은 점점 분주하다 넓은 평수가 힘에 부쳐 태워가며 어깃장을 놓는다 올 여름은 빨랐기에 갈등은 더욱 진했다 바람으로 전해지는 간격이 두고두고 고랑에 일렁인다

 

여름이 지나 가을 오는 사이 높이가 도망갔다

 

팽팽한 차이가 깨어져 매운 냄새가 난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온도가 불쑥 발끝을 내밀고 견뎌온 시간은 뜨거운 체온으로 붉게 빙 두른다

 

스몄던 물기를 건드리면 누군가 숨겨두었던 간격이 통통 튀어나올 것 같다 매운맛을 풍겨 마구 뜀박질할 것 같다

 

한낮 물관 안은 여전히 캄캄하고 먼 광년 태양계에서 쏟아져 나온 통각으로 열기 가득한 밭은 오래전부터 간직했던 꿈의 나라, 꿈의 이상향으로 널려진다 37. 5도로 살며시 올라가본다

 

-시에티카 2014년 상반기 신인상 당선작

 

 


 

 

이영림 시인 / 月下

 

 

모란시장 사거리 건강원

할머니의 할머니가 다녀가신 곳

그곳엔 누군가를 기다리는 밀봉된 능선으로

오색의 뱀이 천천히 우려지고 있다

 

농염한 어둠 속

우러나온 물방울의 너비가 점점 커지고 있다

푸른 숲이 들어와 불이 두꺼워지고

어둠은 자꾸만 얼룩의 얼굴을 헹구어냈다

 

머리 센 할머니의 흰 말씀과

괘종시계가 세 번 울리기를 기다려

똬리를 튼 백색 편지가 둥실 떠올랐다

 

독이 하얗게 색을 우려낸 병 속을 들여다보면

둥글게 안으로 말린 투명한 밀서가 숨어있었다

대낮의 화려한 말씀들이 궁서체로 바뀌어

편안하고 쉽게 읽혀졌다

 

내장과 껍질, 그를 꼬여내던 빈 마음 까지를

지독히도 우려내어

독은 이제 둥글고 표면을 가졌다

당신이 보낸 짙어진 마음을 읽듯

밀봉된 격정적인 꽃숭어리를

고개 들어 바라보는 새벽

 

어른어른 흔들려 때론 반짝이기도 하는

숨겨진 물의 사연이 뜨겁다

 

-시인정신 2017 여름호

 

 


 

 

이영림 시인 / 드라이플라워

 

 

거꾸로 매달려 말라온 시간이

폐경의 빛깔이다

장미꽃과 목이 부러진 연밥

안개꽃으로 둘러싸인 시절을 지난

저 빈 몸이 숭숭하다

 

스스로 부서져내려 꽃장판 위로 떨어지는 환각

끈으로 동여매도 먼지 날리는 속내

 

우기의 색이 바래고

매달린 꽃가지가 여위었다, 향기로운 기억의 방향으로

 

내리닫이로 가는 길

오래전 시간의 정원사는 그래도 버티라고

바랜 길을 천천히 걸으라 했다

 

누군가의 상징 속에 홑겹으로 피어나는 색들

그것이 마른 꽃의 길이라고

꽃의 전부라고

 

따뜻한 바람 불면

건조된 꿈을 웅숭그리다

낯선 누군가의 기억의 벽에 다가가 화려하게 걸리라고

 

-시인정신 2017 여름호

 

 


 

 

이영림 시인 / 평강의원

 

 

한 걸음씩 소리가 난다

어디선가 끽끽 빠지는 소리

조금씩 숨줄 조여 나지막한 옹알이

사방을 두리번거려 봐도 알 수 없어

멀리서, 가까운데서 그리고 옆구리에서

 

거기는 오래도록 귓바퀴에 꽈리 꽃 피던 곳

마음 조려 한날한시

주렁주렁 열린 붉은 피가래

천천히 걷는 도로에 마른 꽃잎 흩날린다

"얘, 평강의원에 가고 싶어,

일단 한 재 먹어 봐야지 빨리 가고 싶어..."

힘줄 잡힌 손가락이 구부러져 비어있다

속 알 빠진 열매 혼잣말로 일그러져 어딜 가나

한 평생 뒷바라지한 자식 전화번호를 목에 걸고

길 잃은 치매 할머니 꽈리를 불며 걷는다

 

끽끽, 천식 걸린 봄 길 만큼 기우뚱거리다 멀어진다

 

 


 

 

이영림 시인 / 사랑니의 방

 

 

한쪽이 비어야 한다

지그시 눌러보는 공간과 공간 사이

뜨거운 것들은 위로 오르려는 습성이 있어

불꽃은 활활 타오르며 날개를 가진다

비로소 새가 되는 것이다

희뿌연 연기와 회 덧칠에 갇힌 겨울은

몸을 뒤척여 온도를 만지기 시작했다

화덕은 공손하게 입안을 드러낸다

 

사각의 프레임이 벽에 걸려있다

테두리부터 고요해지는 건 사각입니다

비상하려면 뜨거움이 필요하지요, 불같은 것 말입니다

목구멍을 막는 포르말린 위로 신경다발이 외마디를 지른다

우리는 필요 없어요

과감하게 잘라낼 수밖에요

메케한 냄새 뒤로 감수성의 허연 뿌리가 뽑힌다

의사는 말없이 날아간 불을 기록한다

 

치 익 밥물 오르는 소리와

지글지글 찌개 끓는 소리가 궁벽의 공간에 가닿는다

내다버린 것들이 제자리로 갔을까

사각의 흔적을 두고 온 막다른 곳에

천공(天空)의 고요가 걸린다

저변이 뾰족한 곳은 침묵 같은 공간이다

하나를 버리고 또 다른 하나를 가지는 것은

타오르는 법칙 중의 하나이다

새하얀 쌀밥이 빈방에 구수하다

한달음에 올라가 버린 아궁이 벽에 날개가 덤으로 그려졌다

 

 


 

이영림 시인

경북 영덕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전문가과정 수료. 2014년 《시에티카》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에티카』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