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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철 시인 / 약해지지 마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4.
박철 시인 / 약해지지 마

박철 시인 / 약해지지 마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박철 시인 / 솜씨

 

 

1

강에서 좀 먼 곳

낚싯바늘 만드는 솜씨를 보았다

깊게 골이 패이고

송이처럼 뭉툭한 손이었다

강철선을 구부려 그라인더에 갈고

끝이 보이지 않게

미늘도 곧추세웠다

거기 내가 걸려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한 곳 여린 뼈 같은

촉수를 바라보다가

당신의 손끝을 생각했다

 

2

지워지지 않는 날카로움 두려워하지 않는 이 없으나

오랜 세월 내 곁에서 멀리 떨어진

당신의 솜씨는 또 어느 굵은 손이 빚었을까

그 손이 남긴 무늬, 빚어낸 충격

당신의 눈빛과도 같은

거기 내가 걸려도 죽지 않을 것 같았다

 

3

들길 한가운데 낚싯바늘 건네는 솜씨를 보았다

하늘 아래 높은 곳

바람을 움켜쥔 손이었다

무엇이든 낚을 수 있어요

우리는 모두 여기에 걸린답니다

쇄빙선처럼

누군가를 위해 목숨 바친 세월

사는 동안 내가 나와 헤어질 수 없었으니

나는 나의 솜씨에 걸리는구나

그걸 깨우치기까지

몇 해 몇 리를 보냈는지 모른다

 

4

그리하여 이즈음 마땅히 나를 걷어 올리자

망막을 가르는 섬광 하나가 허공을 휘휘 돌고

당신과 나 그리고 그분은 아직 떠난 것이 아니었다

당신은 여직 당신의 당신 안에 있었다

모든 당신은 신神이다

어제도 광야에서 잊지 않고 손톱 끝에 올린 말

우리는 달아날 수 없다네!

여기서 나는 한 토막의 얘기를 전하려 한다

 

5

누구나

낮과 밤이 되어

어김없이 돌아서듯

모두

집으로 간다

흙으로 간다

 

돌아가기 전

누군 주연이고 누군 조연이고

누군 물고기이거나 강가에 앉았어도

무대일 뿐이다

 

 


 

 

박철 시인 / 내 아내 세컨드

 

 

신장개업한 중국집 주인 빼고 누가 나를 반겨줄까

오래 되었다면 오래 되었고

새롭다면 새로운 외포리 등대 같은 사람

나의 아내는 항상 두번째지

맛있는 것은 내게 먼저 주고

비싼 옷도 내 것만 사고

내가 잠이 깰까 봐 조용히 걷지

성당에서 현금을 낼 때 주머니를 뒤적이다

만 원짜리와 천 원짜리가 있으면

만 원은 내 봉투에 넣고 천 원짜린 자기 봉투에 넣지

시댁에 전화 할 때도 언제나 저 둘째예요

장에 가서도 머뭇거리는 손짓

돈을 셀 때도 두 번 인사를 할 때도 두 번

세상을 늘 그렇게 지면서 살아가지

아이들과 세상 영화 다 누리고

언젠가 하느님 곁으로 갈 때도

나 떠난 뒤 그렇게 두번째로 왔으면 좋겠다

 

 


 

 

박철 시인 / 연

 

 

끈이 있으니 연이다

 

묶여 있으므로 훨훨 날 수 있으며

줄도 손길도 없으면

한낱 종잇장에 불과하리

 

눈물이 있으니 사랑이다

사랑하니까 아픈 것이며

내가 있으니 네가 있는 것이다

 

날아라 훨훨

외로운 들길, 너는 이 길로 나는 저 길로

멀리 날아 그리움에 지쳐

다시 한번

돌아올 때까지

 

-시집,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2013.

 

 


 

 

박철 시인 / 묵은 별

 

 

조부는 비위가 약한 분이었다

69년인가 사람이 달나라에 갔다고 요란들일 때

마치 요즘 손전화 들고 다니는 거 못 보는 이처럼

쾅 하고 미닫이문에 찬바람 일으키며

저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달나라는 자부동안이다

그깐거 좀 갔다고

아마 조부는 당신이 노닐던 땅뙈기 잃은 양 싶었는지

며칠 더 오뉴월 고뿔에 시달렸는데

 

오늘 보길도 동백숲

까만 몽돌 위에 쏟아지는 별들 마주하다

나 또한 뭔가 우루루 잃어버리는 설움에

바닷물 휙 걸어 잠고 돌아눕는 물굽이

 

그깐거 사람 하나 잃었다고 발걸음 하곤 아서라

조부는 황새걸음에 지금쯤 지구 반대편까지 서너바퀴는 돌아

땅속 깊은 곳 뜨거운 물 위를 겅중거릴 텐데

저간엔 아무 일 없다는 듯 오뉴월 묵은 별 하나

천릿길 만릿길 허공중에

사뭇 빛나다

 

 


 

 

박철 시인 / 인연

 

80년대 초입, 오래 전의 일이다

글을 쓰겠노라고,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

외로움과 싸우던 젊은 날이었다

어느 날 푸른 욕정을 참지 못하고

눈길을 내려와 인월에 이르러 하룻밤을 보낼 때였다

내려앉는 여인숙에서 여자를 하나 부르니

나이가 사십이 넘는 당시로선 중늙은이였다

낯설기도 하고 조금 슬프기도 하였으나

어렵게 나란히 누운 사이 주인이 달려와 문을 두드렸다

검문이 나왔다는 것이다

여자는 혼비백산하여 방을 빠져나가고

내가 노루처럼 멍하니 지리산 쪽을 바라볼 때였다

주인이 돌아와 나를 이끌었다

저쯤 골목 끝에 여자가 있으니 그리 가라는 거였다

방문이 길바닥에 맞닿은 쪽방 하나가

여자의 거처였다 여자는 나이에 맞지 않게 아직 떨고 있었다

간단히 일을 마치고 여자는 뒤척였다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입맛대로 들이닥치는 단속

가족이 알면 큰일이라는 것이다 대구 여자라는데

어찌하여 대구 여자가 전라도에 와 이런 일을 하느냐 물으니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들은 어리고 애들 아빠가 갑자기 차사고로 세상을 뜬 후

먹고살자고 이 일 저 일 해보았으나 빈 손짓

애들 아빠 친구들은 도와준다고 슬금슬금 가재미눈을 뜨고

얼굴 반반한 게 죄라서

당최 사내들이 가만 놔두지를 않더라는 것이다

결국 아이들 몰래 이 남자 저 남자를 거치다가

식당이며 공장이며 몇몇 일을 하다가 이리 되었다는 것이다

조금 전 무심했는지 한번 더 하라고 몸을 돌리면서

데모하다 도망온 학생이냐고 물었다

큰애가 공부를 잘해 겨울에 시험을 보는데

사관학교에 갈까 경찰대학에 갈까 고민중이니

어떤 게 낫느냐고도 물었다

둘 다 괜찮다고 말하며 몸을 내려올 때 문밖에서 호각소리가 들렸다

새벽녘, 잠이 든 그녀를 두고 골목을 빠져나오다가

모퉁이 구멍가게에서 계란 한 봉지를 사서

되돌아가 슬며시 문을 열고 들여놓았다

방문 소리에 잠이 깬 그녀가 아유, 이걸 뭘, 하며 몸을 일으키곤

밥이나 좀 끓여 먹고 가라고 손을 잡았다

첫차 타고 산에 올라야 한다며 돌아나오는데

아침 해가 까맣게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은 경찰 간부가 되어 있을 그의 아들과

환갑이 넘었을 그니 생각을 하는 이 밤

그것도 내 사랑이었던지

쫓기듯 멀어지지 못하는 기억이 되어버렸으니

80년대 초입 어느 날의 일이었다

 

 


 

 

박철 시인 / 빈 병과 크레인과 할아버지와

 

 

오늘도 너와 나 그리운 마을에 섰다

한때 싱그러운 생기로 가득 찼을

빈 병이 이마를 맞대고 담 밑에 옹기종기

일가를 이루고 있다

 

가랑비도, 숨어들어온 빈 병 속의 투명한 햇살도

맑고 곱다

목장갑을 낀 할아버지가 보랏빛 바람을 끌고 다가와

빈 병을 들어 가슴에 안고간다

빈 병 모으는 할아버지는

이렇게 오후의 젖은 햇살을 끌어다가

오늘밤 하루 따뜻하게 주무시겠다

 

강서구 방화동 골목길을 따라

9호선 전철 공사가 한창이다

힘 좋은 크레인이 마을을 들어올리고 있다

나 크레인 몰고 달리고 싶다

 

홍안의 손놀림을 따라 세상의 한 모퉁이가

자리를 바꾸어 앉으리라

나 크레인 몰고 너에게 가서

아침 햇살이 오후의 빗줄기를 피해

담장 밑 빈 병 속에 숨어 있다 말하리라

 

빈 병처럼 터널처럼 또 가슴을 비워내면서

사람들이 숨가쁘게 흙을 나른다.

이리저리 H빔이 날아다니는 하늘가

오늘 하루 검게 그을은 무쇠의 손길로

달려가 너의 닫힌 가슴 두드리리라

땅 속 깊이 박힌 몸 뽑아 멀리 달아나리라

나를 버티는 축은 빈 병과

할아버지와 오후의 젖은 햇살과 얼굴 흐린 그대

 

여기는 모터 소리 요란한 마을이다

 

 


 

박철 시인

1960년 서울에서 출생. 단국대 국문과 졸업. 1987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 1997년 《현대문학》에 단편 〈조국에 드리는 탑〉이 추천되어 소설가로 활동 中. 시집 『김포행 막차』 『밤거리의 갑과 을』 『너무 멀리 걸어왔다』 『새의 全部』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험준한 사랑』 『사랑을 쓰다』 『불을 지펴야겠다』 『없는 영혼에도 끝은 있으니』. 11회 천상병시상, 12회 백석문학상 수상, 2019. 제16회 이육사 시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