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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태화 시인 / 초생달을 바라보며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4.
정태화 시인 / 초생달을 바라보며

정태화 시인 / 초생달을 바라보며

 

그대 빈 가슴 차오르는

물결이고 싶다

그냥 그 물결만은 아닌

물결들 사이 사이에

은빛 지느러미

숨소리 숨겨서

날이 갈수록 덩이박 자라는 초가

그런 이야기가 정겨운

창이고 싶다

 

그러다가 이웃집 아저씨

나이 몇 살 더 잡숫고

너와 나의 마음가에 앉아

낚시나 드리우는

꼭 그만큼 한가로운 때는

이제는 자랄만치 자란 큰고기

지느러미 숨소리로

무게도 가볍게 얹혀서 가고 싶다

 

-정경화 시집 『선인장꽃은 가시를 내밀고 있다』 중에서

 

 


 

 

정태화 시인 / 귀향일지

 

 

파도처럼 밀려오는 바람 속을

뜀박질하며

소나기구름 하늘 아래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을 어머니

눈빛 모시적삼을 생각했다

 

해마다 6월 이맘때면

모심기 품앗이로 텅텅 비운 빈 집을

만삭으로 흔들리고 있을

빨랫줄을 생각했다 장독대 위는

대록 대록 다람쥐 눈

 

오늘은 하늘이 흐린날

지느러미 물살 시리게

내고향 낙동강 지류를 올랐다

 

 


 

 

정태화 시인 / 휴대폰 결번을 손안에 쥐고

도로명주소에서 당신이 헐리고

내비게이션 설정된 경로가

취소되었다

세상에 당신을 되살려 불러오는

시스템은 없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들이

삭제되었다

지금 이 길은 그냥 의미도 없이 뻗어가는

스쳐 지나는 것들에게 휩쓸려 가는

구르는 것들이, 구르고 있는

구르는 바퀴의 대열에서 그냥 일없이

이탈하지 못하는

깊은 잠 하룻밤 쉬어가지도 못하는 그런

사실조차도 모르는 너희 바퀴들의

체험 삶의 현장

이 길은 그냥 대책도 없이 길일 뿐

사방팔방 널려 있는 그냥

길 위의 길일 뿐

 

 


 

 

정태화 시인 / 내가 나를 말해도 될까

 

 

 이렇게 컴퓨터 자판 정수리에, 두드려 심는 질문이 있다

 

 사람이 사람의 손가락 와르르 쏟아져 들어가는, 깜박이는 커서 낚아채 모니터 화면 클로즈업 불러올 수 있을까 그래 그냥 절도 있게 처박히는 송골매, 컴퓨터 자판을 척척 빠져들어 가서

 

 팔다리허리어깨 관절과 관절 마디를 겨울 칼바람 싸늘해지거나 활화산 분화구 독감의 머리 아라아리 뜨거워지거나 그런 절차를 거쳐서, 스트랜딩 증후군 상륙시키는

 

 여기는 당신이 당신을 허락한 사타구니, 리아스식 해안을 찾아서 떠내려온 섬이 있는

 

 너와 나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 그런 분위기를 믿어도 될까

 

 수분함유량 70%, 염분함유량 약간의 그것들, 가루반죽 수제비 뜨기 우리들이 툭 툭 당신에게로 뛰어들었다는

 

 그래도 그것들이 말이 되고 문장이 될까 오체투지 복지부동의 자세 가랑이 아래로 머리를 두는 저두족低頭族 와글거리는 손가락들이

 

 컴퓨터 본체 특수합금 철판을 나사못 말뚝으로, 내린 그것들에게, ᄏᄏ 칭칭 감겨 들어간 길을 돌고 돌아서,

 

 세상 밖으로 무작정 흘러내려도 될까 모니터 화면 가득 얼룩지다가 증발하는 얼룩 당신에게로 가서

 

 이 시대 마디가 마디를 부딪쳐 만나는

 

 닫아 걸린 말을 제대로 한번 열어젖힌 이름이었다고 그렇게 내가 나를 외치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시집 『내가 나를 말해도 될까』 (상상인, 2021)

 

 


 

 

정태화 시인 / 타임캡슐에 저장한 나쁜 이야기 하나

 

 

 놋쇠숟가락 하나가 여닫이문 깊숙이 빠져 있었어 문고리 구멍에 꽂혀 타다닥 불꽃 튀어 오르는 길 척추脊椎를 느끼는 그림자가 일렁이는 달빛 파도에 쓸리며 흐느 적거리고 있었어

 

 사내들 깊은 밤 주막거리 화투짝 속살에 파묻혀 놀고 있는 동안 공산명월空山明月 밝은 달이 만삭滿朔의 몸 쏟아져 내리고 때때로 주인 버리고 오는 신발들이 보이는 시간

 그 신발 뒷굽을 척척 빠져나온 발자국들

 저희들끼리 우루루 나뭇잎 따라 구르다가

 돌담장 호박넝쿨 아래로 숨어들어가 잠잠했어

 

 이른 아침 백주에 궁둥이 까고 있는 호박덩이 몇몇에

 어머니가 짚으로 엮은 똬리를 받쳐주다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오줌을 누셨어

 그곳에 둥글고 하얀 어머니 궁둥이가 오래도록

 내려앉아 있었어

 

 밭두렁 무성한 잎새 바지 안에 잘 익은 오이들 매달려 있었지 이웃집 밭이랑에서 물오른 가지들이 불쑥불쑥 일어섰어 마음껏 부풀어 팽팽한 그것들과 함께 고추밭에 태양초 고추가 어찌 그리 뜨겁던지 퍼질러 앉은 밭고랑에

 매끈매끈 고구마들이 얼굴 내밀고 있었어

 저녁놀이 아궁이에서 왈칵 숯불을 뒤집어 놓을 때

 어머니 볼 발그레 익어서 돌아오셨지

 

 참 이쁘다 우리 어머니 태양초 고추 하나 머금은 듯 입술 붉은 어머니 고무신 탈 탈 털어낼 때쯤이면 명命 짧은 어머니의 사내가 내려놓은 울음들이 달려 나왔지

 왈칵 기다림이 반가운 아이들

 앞장세운 변성기의 아이 하나가

 감나무 키 큰 그림자

 사립문 밖 보내놓고 있었지

 

 호롱불 밝혀야 어른어른 떠오르는 밥상

 주춤주춤 아랫목이 내어놓은 보리밥 속에

 언제 숨어들었나 고구마들 숨죽이고 있었지

 등뼈를 쓰다듬는 어머니 능숙한 손길에

 씨앗들 모두 빼앗기고 얌전해진

 가지나물 오이냉채가 입맛을 당겼지

 놋쇠숟가락으로 식구食囗들이 밥을 먹고 있었어

 

 


 

 

정태화 시인 / 사람이 사람을 만날 때는

 

 

조각조각 깨어진 햇살 파편,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하동 쌍계사 벚꽃 길 벚꽃나무 아래서

길을 잃고 사람을 만날 때는

 

그윽한 바람의 눈매 그 사람과 우뚝

마주서지 말아라.

 

하동 쌍계사 벚꽃 길 벚꽃나무 아래서

길을 잃고 사람을 만날 때는

 

하늘하늘 나부껴 흐르는 꽃잎

올려다보지 말아라.

 

당신도 필시, 조각조각 깨어진

모서리 날카로운 파편(破片) 바람일 것이니,

 

-시집 『내 사랑 물먹는 하마』 에서

 

 


 

 

정태화 시인 / 빅-엔젤 그러니까 어떤 목욕 이야기

 

 

한때 너를 씻기는 내가 너의 아비였는데 이제 네가 나를 씻기는

 

한 아이가 오래 걸어온 길 씻김을 받는

 

언젠가 그때는 내가 너를 씻기는 백열등, 창문이기는 했었지

 

생각을 멈칫멈칫 꺼내놓고 있는

 

그러니까 당신은 처음부터 나를 씻기는 그림자였는데

 

내가 당신의 등 그림자를 씻기고 있는

 

그런 그림자들이 무럭무럭 늙어가고 있는

 

이태리타월 한 장의 손길로 너의 등 뒤에 내가 있기는 하지

 

생각을 불러내고 있는

 

내 그림자가 너의 그림자를 씻길 때 나는 아직 나를 씻기는 네가

그때의 나보다 깊이

 

눈보라 흩날려 올 줄은, 허-허 바람이라는 것들의 지문회오리에 너마저

끌려들어 갈 줄은, 그럴 줄 미처 몰랐더라는

 

 


 

정태화 시인

1958년 경남 함양 출생. 본명 정경화. 1994년 계간 《시와 시인》 신인상 수상을 통해 등단. 2007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선인장꽃은 가시를 내밀고 있다』 『내 사랑 물먹는 하마』 『내가 나를 말해도 될까』. 2017년 제2회 지리산 지역 문학상 수상. 현재 한국시인협회, 지리산문학회, 한국문인협회 함양지부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