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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남식 시인 / 첫 입맞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5.
정남식 시인 / 첫 입맞춤

정남식 시인 / 첫 입맞춤

 

 

부드럽고 다스한 입술 그 감미로움

가슴속의 열정을

혀 끝으로 녹여 내리는

달콤한 첫 입맞춤

 

떨리듯 슬픔도 외로움도

씻어 버리고

황홀한 감촉의 낙원에서

 

저바다 깊은 곳으로

저 하늘 끝까지

깊숙히 간직한 채로

 

인생의 황혼기에

잠 못이룬 긴 날들

되새겨 볼 겨를도 없이

포근히 잠들어 버렸읍니다

 

 


 

 

정남식 시인 / 굴참나무 밑에서

 

 

굴참나무 뒤로 계곡 물이 흐른다

물소리 점차 불어나고 이내 어두워졌다

큰 물소리를 귀에 베고

휴양림 산막에 누웠다

 

굴참나무처럼 서 있었다

소리도 없이 번개가 산 너머에서

빛을 냈다

 

불안한 귀로 보았다

번개 불빛에 뼈처럼 드러난 물살들

네 살이 확, 넘쳤다

 

 


 

 

정남식 시인 / 슬픔은 꽃피어나는 거야

 

 

슬픔이 꽃처럼 똑, 떨어졌다

슬픔이 눈을 들고 나를 쳐다본다

슬픔은 이렇게 지는 게 아니지

슬픔은 꽃피어나는 거야

태산목 싱싱한 가지에서 살점 같은 꽃잎이

뚝뚝 듣는다, 풀잎들이 그 살을 파먹고

꽃잎은 말라죽어 슬픔의 뼈로 남는다

바람이 스미어 풀 속에 눕는다

부스러기의 힘으로 기어가는 붉은 흙 울음,

지렁이의 슬픔, 온통 풀밭이 푸르네

 

 


 

 

정남식 시인 / 세월의 독화살

 

 

나는, 멀리 시간을 구르는 그대를 떠나왔건만

어리석구나 나여, 그 무엇을 기다리는 나는

그렇구나 나여, 그 누구를 기다리는 나는

이렇게 홀몸으로 마음껏 가득 찼는데

마음아, 해치워야 할 무엇이 또 남았는가

나는 내 안에 그대를 모두 채워 넣었다

그런데 내 옆에는 부스럭거리는 삭정이처럼

한숨의 폭풍에 너덜너덜한 팔만 매달린 뿐

시간의 바람이 나를 툭 부러뜨리고 지나간다

내 안에 그대를 모두 채워 떠나왔건만

어찌하여 나는 몸을 잃어버렸던 말인가

시간을 구르는 그대, 그대를 굴리는 시간 앞에서

이미 나는 세월의 독화살을 맞았나보다

 

 


 

 

정남식 시인 / 입가로 새가 날았다

 

 

외도의 선착장이 바다에 슬그머니 잠겨있다

사내의 맨다리가

주름치마 펼치듯 여름 파도에 닿고

떠날 시간, 배를 기다린다 너는

오지 않았다. 그해 겨울

 

삼월에 폭설, 사륜구동의 바퀴가

눈 위로 미끄러져서는 바다앞에 멈춰 섰다

시동 끄고 추운 배의 그늘에 몸을 실었다

처음 겨울 바다에 눈이 멀었다

제주 해안가에 잠시 끓는 볕이 차가웠다가

네 발끝으로만 아름답게 지나갔다

 

외도 선착장에 배가 포물선을 그리며 들어온다

떠나기 위해서는 저렇게 둥그렇게 돌아야 한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그저 몸만 버리면 다 되었던

 

어두운 물에 물들고 나서......

 

날에 빛이 감돌고 바람이 분다

너는 이곳에서 살지 못하리라

 

바람의 언덕에서 날지 못해

바람이 언덕을 낳고 언덕은 바람을 키웠다

그곳에서 바람, 비행 연습을 했다. 그해 겨울

 

섭지코지 난간 밑에 묻어 두었던 살바람이

살기를 띠기 시작했다, 헤어지고 나서야

죽은 바람이 가슴 난간밑으로 떨어졌다

 

붙잡고 껴안고자 무던히 애쓰던 바람을

바람부는 무위의 언덕에

던져 버린 그해 겨울, 지치다가

 

너는, 한여름 겨드랑이에

바람을 부드럽게 풀어놓는다

바람의 언덕 너머 저편에서

잠시 가벼운 구름의 땀이 일다 사라지고

알을 품듯 희미한 깃털이 날렸다

입가로 새가 날았다

 

 


 

 

정남식 시인 / 휴식

 

 

어둠이 조용히

닫힌 창문으로 들어오고 있다

휴식을 의미한다 고마운일이다

 

낮의 그 격렬했던 활동

피로하고 지친 마음을

이 어둠에 놓아두고

침묵과 함께 쉼 있어 기쁨니다

 

내일 또 다른 도전과 업무를 감당할 육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의욕

오늘은 이제 어둠속에서 휴식하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밤의 시간을 아끼자

 

두눈을 감고 호홉을 조절하며

뻐근한 근육을 밤에 묻어두자

내일을 위하여 고마운 어둠이여

밤이여 나의 휴식이여

 

-2002년 3월 16일 회사를 정리키로 하고

 

 


 

 

정남식 시인 / 단풍처럼 붉어지다

-라영에게

 

 

 한때 내 몸은 푸른 물로 가득 찼다. 푸르른 가슴에서 붉은으로 흘렀다. 공기가 시냇물처럼 온몸에서 흘러내리고 온전히 나는 소모되었다. 그래도 푸른 건천이 머리에서 발끝으로 돌아 나를 뛰게 하였고 뒤를 돌아다볼 이유가 없었다. 나는 때로 빠져나가곤 했다. 내 몸의 물이 탁하게 흘러 풍진의 강이 범람하였다. 나는 슬픔의 젓가락으로 노를 만들어 헤쳐 나갔다. 나의 이 젓는 힘은 여일하여 부러질 때까지 쓰러져서도 앞으로 저어 나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슬픔이었다.

 

 흘러가다 문득 깨었을 때 새벽 물소리였다. 달이 나를 지나쳐 붉은 물을 흘리게 했다. 월경통이 시작되면 별을 바라보았다. 별이 스러져서야 나는 씻기어졌고 빛이 어느새 스며들었다. 숨은, 햇빛이었다.

 

 그토록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빠져나간다. 붉은 물이 점점 탁하게 흘러 줄어들고 있다. 달밤의 나날이 나의 이마를 자줏빛으로 물들이더니 점점 아래로 내 몸은 흘러내리고 있다. 푸른은 발바닥에서 이마를 지나 정수리로 돌지 못했다. 자꾸 흘러내리는 붉은 물을 나는 손가락 새로 흘리고 있다.

 

 양수를 만들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나는 여러 푸른 양을 키워 보았지만 누런 음이 되었다.

 

 그림자 없는 그늘로 누워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의 생을 나는 얼마나 받아 주었는가.

 

 혈액 없는 피로 물들여질 때이다, 이제

 

 나는 단풍으로 붉어질 것이다.

 

 


 

정남식 시인

1963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 1988년《문학과 사회》에 <물-비>외 4편으로 등단. 시집 『시집』 『철갑 고래 뱃속에서』 『입가로 새가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