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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종인 시인 / 어긋난 세계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5.
박종인 시인 / 어긋난 세계

박종인 시인 / 어긋난 세계

 

 

 시간은 세 시에 사망했다

 

 여기는 에덴, 젊고 싱싱한 차들이 쌩쌩 달린다. 갑작스레 사과 하나 훔쳐 먹자 도미노 현상이 전개된다. 멀쩡하던 도로에 용량을 초과한 대형트럭이 큰 통 하나 떨어뜨린 것 같다. 문제가 많은 세상이다. 도로는 급속히 구부러지고 휘어지고 차에서 뛰어내린 통은 폭탄이다. 도로가 꽝꽝 폭발한다. 질병과 불안전이 연쇄 충돌한다. 비명은 역대급이다. 직진으로 달리던 속도는 쓰러지거나 주저앉았다. .

 

 사고의 파편이 이리저리 튕긴다. 뒤따라오던 오후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의식이 흐릿해진다. 속도는 방전되고 체증으로 짜증으로 주말의 고속도로가 사람들이 폭발한다. 도로변 가로수들도 덩달아 폭발하고 길의 꼬리는 점점 늘어난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뒤안길이다. 마지막 날의 특징들이 튀어나온다.

 

 길가에 잠복했던 레커차가 구급차보다 발 빠르게 하이에나 떼처럼 달려오고 하이애나처럼 들시글, 사람들이 신음을 낚아챈다. 사건들이 아파서 아우성친다.

 

-시집 <어긋난 세계>에서

 

 


 

 

박종인 시인 / 난을 치며

 

 

붓이 접근한다

붓 낚싯대

먹물의 중심을 흔든다

출렁이면서 미끼를 무는 강

낚싯대는 재빨리 고기 한 마리를

화선지로 끌어 올린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한 뼘, 강이 팔딱팔딱 낚인다

낚싯대는 강을 자꾸 낚아 올리고

뾰족뾰족한 입들

흥분을 일으키는 스킨십

엔도르핀이 솟는다

도파민의 척도가 쑥 올라간다

 

먹물 한 점 한 점

여백을 향해 줄기를 뻗는다

떨리는 손가락 사이로 싱싱한 세상이 태어난다

한 폭의 풍경을 벽에 건다

 

 묵향이

   그윽하다

 

 


 

 

박종인 시인 / 미술관에서 애인을 삽니다

 

 

 미술관이 하품할 때 나는 슬쩍 입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림이 열차처럼 한 량 열 량 늘어서 있습니다 증거물을 찾으려고 차창 안팎에 돋보기를 들이댑니다 나는 그림을 읽고 있습니다. 바퀴들이 달리기 시작합니다 마네의 요리<풀밭 위의 식사>가 도마 위에 오릅니다 오소소 닭살 돋은 닭다리를 집 어 들자 두드러기가 일어납니다 내 안의 검문소가 철컥철컥 '여자는 느끼고 남자는 생각한다'라는 단서를 포착합니다 발가벗은 여인의 알리바이를 조사합니다 양복 입은 두 남자가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탕탕탕

 

 열차를 뒤지다 명암을 요리한 화가들이 마술사로 변장하여 사기 치는 현장을 포박합니다 세상은 해학입니다 어둠과 음침함, 밝음과 깔끔함,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교묘하게 채색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킨 죄를 추가합니다

 

 달리고 있는 열차 7호 칸에서 화가들의 죄목에 대해 조서를 꾸밉니다 고갱이 <우리는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를 절묘한 색채로 요리했다 변론합니다 우리는 입으로 들어가 항문으로 가는 중입니다 듣고 있던 싯다르타와 플라톤 과 막스가 판결을 내립니다. “당신은 유죄입니다” 탕탕탕

 

 미술관에 갇힌 화가들은 색채로 마술을 부린 죄로 심판을 받습니다. 수백 년이 지나도 죽지 않는 화가는 분명 마술의 대가, 치러야할 형량이 늘어납니다 보시죠. 면회 오는 저 끊임없는 발길들을, 애인을 한 점 사서 드셔보시죠 열애의 맛이 기가 막힐 것입니다

 

 


 

 

박종인 시인 / 여백

 

 

 수심이 얼마만큼 깊은지 나를 접을 때 그들의 생김새가 보인다 206개의 뼈를 지지하는 버팀목으로 나는 먼 길을 걸어왔다

 

 시간이 흐르고 발바닥이 부르튼 경험으로 그들을 인식할 수 있었다 더러 일자형도 있었지만 나는 아치형이라 균형을 잃지 않았다

 

 탄력과 여백으로 스프링이 장착된 나는 스프링복처럼 높이 뛰어올랐다

 

 작은 웅덩이, 거꾸로 흘러도 젖지 않는 웅덩이 두 개 위에 내 무게를 올려두고 여기에 닿았다 수평을 잡아주는 족 아치,

 

 양말을 벗는다 종일 어둠에 갇혔다가 밖으로 나온 이 발바닥의 여백

 

 


 

 

박종인 시인 / 바다와 벚꽃이 있는 연극무대

 

 

 공간적 배경–아테나여신 얼굴

 입–바다

 코–의자

 눈동자–아파트

 

 광안리 바닷가

 

 제1막

 

 큰 입이 벚나무를 쏟아낸다. 흩날린 꽃잎이 갯바위를 덮는다. 입술 위를 거닐던 내 삶의 꽃물이 시간을 역류시킨다. 갈매기 공중전이 한창인 대극장 무대 위 긴장감이 날 선다.

 

 영역 다툼에 휘말린 관객석, 여신 아테나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 결국 입에 명령을 내린다. 모래 무대 위로 벚꽃 만발한 벚나무들, 맹렬히 말 탄 군사같이 출동한다. 전쟁포로로 끌려가던 나도 연거푸 벚꽃을 토해내고 놀란 앤이 구하려 바다로 뛰어든다.

 

 마음 밖 무대

 

 망나니 행인 #1 ……

 갈무리 행인 #2 ……

 

 言이 몰입을 찔러 분위기 죽고 기분도 죽고 과거는 달아난다.

 

 다시 울부짖는 큰 입, 극적 상황이 관람객을 매료시킨다. 앤과 내가 간신히 빠져나오려는 순간, 셀 수 없는 벚나무 군사가 몰려오고 한 군사가 앤을 가로챈다. 나는 눈물 콧물을 토해낸다. 지켜보던 관객이 구원의 밧줄을 던지고 필사적으로 빠져나온 앤도 파도도, 벚꽃 거품을 문다. 속눈썹 짙은 아테나 눈동자도 벚꽃 눈물 흥건하고 우선 멈춤! 상황을 정지시킨 사진사도 들병이 간이의자도 숨을 죽인다.

 

 제2막

 

 역사책에서 걸어 나온 전쟁의 영웅들이 무대에 오른다. 관객들이 야유를 보낸다. 여신 아테나 전쟁을 즐기는 광기 뒤에 매스꺼운 지성을 숨겨 놓았다. 벚나무 군사들, 총칼을 계속 휘두르고 모래 위로 벚꽃 벚꽃 비명이 낭자하다 도시가 무자비하게 부서진다. 나팔소리, 요란한 무대 위에서 장군복에 감춘 지성이 객석으로 군례를 보낸다. 아테나가 객석을 빠져나간다.

 

 


 

 

박종인 시인 / 장롱 리폼

 

 

편지를 쓴다 아이의 양 볼에 편지를 쓴다

아롱아롱 퍼지는 글씨

두 눈망울 그렁그렁 문장을 만들고

울음을 안은 단락이 장롱을 열어젖힌다

 

나는 옷걸이에 물음표를 가득 걸어 둔다

 

편지를 쓴다 아이의 양손에 편지를 쓴다

아이가 장롱처럼 열린다

장롱에 다양한 아이가 있다 그 아이들은 닫힌 서랍 같다

내 장롱은 늘 열어 두고

색색의 아이가 되어 손 내밀고 아이들을 연다

 

나는 아이의 장롱에 들어가 아이 하나를 들고 서 있다

 

다시 편지를 쓴다 아이의 양다리에 편지를 쓴다

서랍을 당기자 아이의 어제가 열리고

구멍 난 바지에 깨진 무릎이 흘러나온다

아이의 키가 훌쩍 자라있다

깡총 발목이 드러난 발목이

내 품을 뛰쳐나간다

 

나는 사라진 아이를 안고 다시 장문의 편지를 쓴다

아이의 가슴에 엄마라는 글씨를 쓰는 순간

꽃봉오리 아이가 흐드러지게 핀다

 

잘 개켜진 아이가

나비를 부르는 꽃향기가 거실과 방안을 날아다닌다

 

옷걸이에는 사계절 아이가 걸려 있다

 

 


 

 

박종인 시인 / 자연오리지널 시나리오

 

 

 나는 生의 절정을 아는 예언자, 미의 여왕 아프로디테가 가슴에 꽃잎을 달고 오는 걸음도 안다 자박자박 꽃들이 4월을 걸어 5월의 나뭇가지 위에 앉아 쉬었다 간다 떨어지는 꽃잎을 편안하게 눕히려 푸른 침대를 활짝 펼친다 시드는 꽃잎을 위해 나무는 무덤처럼 동그란 그늘을 만들기도 한다 뚝뚝 나무위에서 三千宮女들이 뛰어내린다

 

 동물원 잔디밭 나무 그늘 속에 누워 아프로디테가 책을 읽다가 잠이 든다 땅위에 풀밭을 펼쳐놓고, 하늘에는 눈부신 둥근 모자가 걸려있다 쌔근쌔근 고른 숨소리에 밀려 구름이 천천히 서산을 넘어간다 서산 아래 아프로디테의 머플러가 굽이굽이 흘러간다 아프로디테의 꿈밖으로 꽃잎들이 떨어진다

 

 봄은 아프로디테가 꾸는 꿈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떨어지는 꽃들의 손을 잠시 잡았다 놓는다 읽던 꽃을 덮고, 햇빛도 덮고, 나무도 덮고, 마지막으로 봄을 덮고 잠든 그녀를 바라본다 보리수 잎을 건너 바람이 불어오고, 나무들이 빠르게 책장 넘기는 소리에 아프로디테가 낮잠에서 깨어난다 백조들이 잔잔한 신화 속에 발을 담그고 헤엄친다 유유히 이해하기 힘든 문장들이 흘러간다 길게 목을 뺀

 

 백조들이 물음표처럼 호수 위에 떠서 수면을 바라본다 물음표들이 이유 없이 쓸쓸해 보인다 호수위에 찍힌 저 물음표들의 정답은 오직 하늘만이 갖고 있다 이해하기 힘든 문장에 붉은 노을을 친다 온점처럼 찍힌 해가 서산으로 진다 서산 너머로 뚝뚝 봄이 떨어진다

 

 


 

박종인 시인

전북 무주 출생. 한국 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부산 부경대학교 부경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2010년 《애지》를 통해 등단. 부산문화재단 진흥기금 수혜. 시집 『미술관에서 애인을 삽니다』 『연극무대』 『어긋난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