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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영경 시인 / 요술방망이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5.
김영경 시인 / 요술방망이

김영경 시인 / 요술방망이

 

 

지난 밤 안부를 묻는

이슬.

가만히 보니

붉어지는 얼굴 하나

덩그러니

 

되짚어본다

 

흡사

바다를 밀고 오는

파도처럼

고요한 잠꼬대가

덮여 오던

그 모습

 

사랑한다면

달라질 것이다

마음먹으면

자유로워질 것이다

 

모난 돌의

못난 흉내를 내던

버릇은

이슬처럼 반짝이다 사라질 것이고

지난밤

들숨과 날숨의 교차로에서

확인한 안전,

파란불에 달려라

 

사랑이 먼저인지

믿음이 먼저인지

논쟁을 시작하려거든

반짝이다 사라지는

이슬을 본받아

사랑을 먼저

믿음을 먼저

주다가 잊어라

 

반짝이던 기억만 남는다

 

 


 

 

김영경 시인 / 1인용 메시지

 

 

 당신은 감자수프를 만들고 있군요 수프에는 감자가 제격이죠 감자를 휘저으면 사건은 입체적이 되죠 감정은 격발되고 수프는 부드러워지죠 귓가에 쏟아지는 피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였다니 처음부터 플롯은 버릴 생각이었군요 거짓을 쏟아내고도 날 죽이고 싶다면 그때 명중시켜요 당신이라면 날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거예요 르롯이 사라지면 사건은 희미해지고 각혈에는 감자수프가 제격이죠 1인용 메시지 를 찾아야 해요 지금 필요한 건 큰 말 하나 작은 말 하나 선택이 힘들면 다른 사건 속의 밥에게 물어야죠 밥이 내 유일한 사수이니 어쩌겠어요 당신 말에서 자꾸 탄내 가나는걸요 눌어붙지 못하게 실명의 투서로 휘저어 주세요 발각된 것은 격발되어야 한다고 다른 사건 속의 밥은 말하죠 내 머리는 일회용이랍니다 뛰어오르는 것은 터트리고 보는 버릇 하나를 얻었어요 각혈 한 번으로 날려버린 플롯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요 하나만 물어요 새는 머리를 어떻게 운전하는지 알아요? 던져 버리기엔 싹튼감자가 제격이랍니다

 

 


 

 

김영경 시인 / N이라는 복도

 

 

 지독한 향수병자 완벽증 N, 복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N에게 복도는 자신을 증명하는 최적의 건축물이다 N의 복도에는 창문이 없다 거울이 가득한 복도 얼굴이 알루미늄처럼 찢어지는 복도 거울 속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N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복제된다 N은 미지의 불빛에 의지해 구치소에서 보내 온 인디오여인의 편지 를 읽는다 복도는 주름진 헝겊으로 덮여 있다 그것은 N의 향수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람은 두 종류가 있지 복도 끝까지 가본 사람과 가보지 못한 사람 주름으로 접히는 사람과 모형으로 구조되는 사람 완벽증 N은 복도의 끝에 대해 묘사하지 않는다 N은 N의 거울에서 복도를 깨뜨려야 한다 복도 끝에는 비가 내리지 않을 예정이다 비에 젖은 인디오여인이 복도에게 편지를 쓴다 완벽해진 복도는 그의 것이 아니고 거울 속에서 N은 편지를 읽는다 복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지독한 향수병자 N, 완벽한 복도다

 

 


 

 

김영경 시인 / 면접

 찢어지기 위해서죠

 질문이 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얼굴을 맞대죠 뽑기 놀이 중입니다 어떻게 뽑을까요? 침을 묻혀 바늘로 콕콕 가장 큰 특기인 혀를 좀 써 볼까요 뽑기 쉽다는 거에요 쉽게 뽑히죠 어렵게 달라붙어선

 엉망이군요 진창이구요 엉망진창 장관이네요

 아침을 자릅니다 칼은 가지고 다니면서

 열정적으로 싫어해서 아침은

 어제까진 백수, 오늘은 파수꾼이 되겠다고 하네요

 허무하군요 맹랑하구요 허무맹랑이 가관이네요

 티슈는 입체로 간절해진 침묵을 평면으로

 의자는 두고 가세요

 의자를 들고 가는군요

 같은 의자인가요?

 내게 한 질문이 나입니다 질문으로 무늬를 만듭니다 의자는 나의 질문으로 날 데려다 앉힙니다 뽑혀 나온 날 뭉치면 재활용이 될까요?

 전전긍긍 얼굴을 굴려봅니다

​​

-계간 『시와산문』 (2022년 여름호)

 

 


 

 

김영경 시인 / 꽃과 칼을 구분하는 방식

꽃을 좋아합니다 양들은

꽃을 사이에 두고 싸웁니다

양은 나를 웃게 할 방법을 몰라서 꽃을 휘두르지요

꽃과 칼을 구분하지 못해서 양은 자꾸 울고

울기를 두려워하는 양도 있습니다

누나가 죽은 방에서 양을 키웁니다 양은 방에 남겨진 핏물 같고 핏물이 채워진 흰 꽃병 같고 방에는 꽃병의 목을 쳐 버린 칼이 있고

내 양은 목에 구멍이 많습니다

꽃이 드러나는 구멍이야말로

양이 정의로워지는 방식입니다

양은 내 울음소리가 좋아 칼을 휘두르지요 울음은 양이 가진 무기여서

모가지는 자꾸 부러집니다

누나가 웃습니다

꽃병이 사라진 방에서 양과 꽃은 구분되지 않고 양은 사라지고 누나로 가득한 방

누나가 사라진 방에서

 

 


 

 

김영경 시인 / 포클레인

 

 

브레이크 드릴 손으로

척,

갈아 끼우고

땅 딴 땅 땅 땅! 깬다

 

두두 두두두- 판다

 

튼튼한 버킷 손으로

척,

갈아 끼우고

돌덩이 흙더미 푹 퍼

덤프트럭에 담는다

 

척,

집게 손가락으로

강철판을 서너 장씩

나르기도 하면서

 

폈다 접었다

굽혔다 뻗었다

거딩없이

 

전선을 넘나든다

 

유연한 관절

우람한 팔뚝

여러 가지 손을

갈아 끼울 줄 아는

 

 

재주 많은 강심장

 

아무리 단단한 아스팔트 비탈길도

물러서지 않는다 돌진이다

 

가끔 기다란 팔에 온몸을 싣고

척,

엉덩이 들고 물구나무도 선다

 

 


 

 

김영경 시인 / 한여름 서빈백사에서

지미봉 옆구리로 해가 출렁거리면

바당 속으로 풍덩, 부표를 부여잡고

타타타타타 융단폭격으로 내달려

이마를 강타하는 노을 부스러기

벨롱거리는 석양의 너울을 타고

마지막 도항선이 떠나고

지미봉 다랑쉬 한라산이 펼치는

노을빛 오케스트라 공연에

집어등에 홀리듯 묶여 버린 채

섬 속의 섬에 남겨진 사람들

핏빛 노을을 물어뜯다 부서진

파도의 어금니 같은

하얀 작지들이 바스락거리는

서빈백사 바닷가에서

하늘은 붉게 타서 어두워지고

바다는 검푸른 빛으로 잠기고

강물에 떠내려가는 오필리아처럼

바다에 누워 별을 따라 떠다니면

초승달이 모래밭을 하얀 맨발로 걷는다

어떤 이는 백사장에서

어떤 이는 바다 속에서

서빈백사에서 한철

불나비들이 밤마다 바다로 뛰어들고

초승달은 파도의 어금니를 밟으며

사그락대고 별은 벨롱벨롱, 밤의

입천장에 홍조단괴 새 어금니를 내다박는다

 

 


 

김영경 시인

1969년 경남 합천 출생. 경성대학교 식품공학과 졸업. 2019년 《문예바다》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2020《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