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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경 시인 / 노루귀꽃과 토끼똥
노루귀꽃이다 가까이 가서 보니 낙엽 위에 콩알만한 토끼똥 있다
갈색이긴 한데 푸른빛이 도는 것도 같고 참 예쁘다
만져본다 잘 말라 정말 가벼운데 나는 슬몃 웃으며 그 자리에 그대로 놓는다 토끼똥은 제 몸을 말려 바람에라도 굴러서 노루귀 뿌리에게 가려는 마음뿐인 듯 해서다
멈춰서도 걷는다 사랑은
제 자리에 놓자 노루귀꽃 하얗게 웃다
조문경 시인 / 몸속의 길
가마솥에 시래기를 넣고 장작불을 지핀다 얼마 후 굳게 닫힌 솥뚜껑 사이로 김은 새어나오며 들썩들썩거린다 웅크리고 있었을 물의 몸 쉐엑하는 소리를 내며 한곳으로 힘차게 하얀 기둥을 만들며 천장으로 올라간다 티비에서 본 토네이도 모양인데 그 기둥을 물속에 숨어 있던 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느 때까지는 기다리고 어느 때까지는 자기도 모르는 채 가지고 살던 아궁이 불이 활활 타오르자 순식간에 이뤄낸 저길 여전히 솥뚜껑은 닫혀 있지만 물은 안 것이다 몸은 가장 절정일 때 길이 된다는 것을 천장을 감싸던 김이 흩어진다
조문경 시인 / 엄마 생각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아이처럼 404호 요양실 91세 된 할머니 엄-마-엄-마- 하며 콧물 훌쩍이며 운다 잠든다
조문경 시인 / 너의 가시를 존중하다
날카로운 가시 하나 잎사귀 몇 개 가시보다 지름이 조금 큰 노란 탱자
가시의 공격성에 대한 편견만 버린다면 스스로를 수확하기 위한 단출하고 완벽한 자세다
모든 완성의 길에는 보이던 보이지 않던 가시가 있을 것 공격하는 자에게만 상처를 남기는
하지만 보라 가을이 와 떨어진 탱자에는 가시가 없다
조문경 시인 / 삶
대문 나서자 유촌 할매 첫인사가 시어머니 똥 눴는가 묻는다 아니요로 시작해 이만저만하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반복한다 병원가면 어머니 첫마디가 쥐 안부다 보일러실에 놓은 쥐약을 먹었냐고 묻는다 난 평생에 한번도듣지 않았던 안부로 어머니는 구십하나를 사셨다 똥과 쥐의 안부사이에서
조문경 시인 / 소쩍새 우는 밤
소쩍새 소리뿐인 밤이다
생전 시부모님 잠에서 깬 것인지 두런거리던 말소리 무슨 말씀 저리 많아 주무시지도 않을까 싶었는데
오늘 그 자리에 누워보니 별말이 아니다 소쩍소쩍 참 구슬프네 하고 한두 마디 더 했을까
소쩍새 소리뿐인 밤이다
조문경 시인 / 제비꽃
천둥과 비바람으로 벚꽃 졌다 어제만 해도 눈부심으로 사람들 열광했다 꽃잎 떨어진
고개 숙여야 볼 수 있는 거기 보랏빛 모으는 입술, 제비꽃
어제는 번개에 깨진 어둔 하늘 비바람의 살내 모았으리 오롯한
모든 발 돋음은 호흡 가쁘다 하나의 이상은 떨어졌고 땅의 명령은 지금, 제비꽃 도도함
조문경 시인 / 고양이와 나눠 먹다
군불 때고 남은 숯불에 고등어를 구웠다 그 파란 냄새를 맡고 길고양이가 새끼를 데리고 아궁이 근처까지 와 있다 부지깽이로 쫓으려다 어미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몸은 경계하는 듯한데 도망치지도 않고
올려보는 또렷한 눈 알맞게 익은 고등어를 석쇠에서 뚝
떼어 앞에 놓으니 새끼랑 맛있게 먹는다 그새 어둑어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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