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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숙향 시인 / 어떤 화장터
월말은 아들 이름이 적힌 고지서와 함께 돌아왔다. 노파는 앙상한 삭신을 움직여 우편함에 꽂힌 고지서를 꺼내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연체료가 붙기 전에 서둘러 보내야 했다. 은행을 향해 걷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불과 10분이면 닿을 집과 은행의 거리, 죽은 아들을 보내던 날의 거리가 자꾸 발목을 잡고 놓지 않았다. 서러움이 복받쳐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허허로운 하늘로 긴 한숨을 내뿜었을 때 가슴에서 고지서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노파는 비틀거리며 은행의 문을 당겼다. 분주한 사람들 틈에 끼어 아들의 마지막 번호표를 부여받았다. 잠시 후 창구에 구부정하게 아들을 밀어 넣었다. 곧 마흔을 살았던 아들의 이름이 저 창구에서 사라져 갈 것이다. 불이 느껴졌다.
조숙향 시인 / 기류 걸었다 궁궐 속을 파헤치며
호중구가 부족하군요
체중은 늘었고 살찐 배는 불룩해도 떨어진 면역력
집으로 그냥 돌아가기 억울하겠습니다 농담처럼 던진 의사의 진담이 늙은 나뭇가지에 걸렸고 여기저기 흙 속에 묻혔던 희빈 장씨의 질투가 분분히 날렸다
억울한 한 여인의 뒷모습이 숲속으로 사라질 때 오래된 새가 오래된 목소리로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불룩한 배에서 가스가 터지며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수술이지요 무덤덤한 의사의 말이 위로와 위안이 될 수 있겠지
백송 한 그루가 몇백 년 하얗게 서 있는 연못을 한 바퀴 돌면서 돌고 도는 게 영혼이라 생각하다가 느닷없이 그는 지구를 얼마나 돌았을까 기억하려 했다
잠시 나를 오래된 숲에 앉혔다 내 속에서 걸어 나온 그가 갈색 휘파람을 불었다
한 움큼씩 오래된 사연들이 내게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조숙향 시인 / 정신과에서
의사 앞이라고 앉아 있는데 그녀는 오래 전 잊었다고 생각한 바닷가에 앉아 있었다 밀물이 서서히 밀려오며 아무렇게나 입을 벌린 빈 페트병과 구겨지고 색이 바랜 과자봉지들 표적 없이 이빨 드러낸 술병 조각들마저 둥둥 둥 물 위를 떠다녔다 떠들썩한 마을을 휘돌아온 바람이 등을 밀 때 파도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의사는 바닷물과 단절을 해야 한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녀는 이유도 모른 채 의사가 내린 처방전을 가방에 넣고 병원 문을 나섰다 그리고 빈 페트병처럼 사람들 틈으로 흘러갔다
조숙향 시인 / 오늘의 지층
1 너에게서 나에게로 가는 저녁 경계가 지워지는 하늘
신선한 아침에 빛났던 너의 눈동자에 모래바람이 분다
너무 많은 밝음에서 너무 흔한 어둠으로 서로를 통과하며 흐린 고요를 남긴다
짝을 잃은 풍산개의 풀린 눈빛에 저녁이 담겨 있다
2 흰나비 떼가 날아오른다 오늘의 일기 앞에서
하늘을 물들이는 낯익은 새소리 철 지난 진달래 꽃잎 웃자란 새싹들 버석거리는 소나무 입술 쉴 곳을 잃어버린 바람이 내 뒤로 사라진다
먼 산에 하얗게 얼음이 덮인다
조숙향 시인 / 내가 품은 바람은 모두 한 순간이다
바람을 품고 살았다 헛헛해지는 바람을 지그시 누르면 가슴에서 풍선이 튀어나왔다 풍선은 감나무 가지에 걸렸고 빨갛게 익은 바람이 그늘을 만들기도 했다 때로는 말 많은 까치가 날아와 바람을 유혹하기도 했다 유혹이 바람의 결핍에서 오는 손짓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바람을 타고 산기슭을 기웃거리며 떠도는 날이 많았다
어린 바람들이 집 안에서 자라났다 지독한 안개가 내리는 밤 아버지는 진고개를 넘다가 바람과 맞닥뜨렸다 밤안개가 옷자락을 여미었지만 축축해지는 바람을 잡지 못했다 가을밤 내내 바람을 잡으려다 바람을 타고 하늘 위로 날아올라 구름이 되었다
아직까지 바람을 놓지 못하는 것은 내 결핍의 빛깔이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다
조숙향 시인 / 접속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온다
내 몸에 붙는다 더듬이를 까닥까닥 내가 무엇인지 확인한다 걸음을 당기자 내 주변을 샅샅이 탐색하다가 내가 지나온 오솔길 상수리 나뭇잎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나비는 내가 먼지인지 구름인지 바람인지 새소리인지 알아챘을까
나는 마스크를 벗는다
조숙향 시인 / 여기, 서성이다
1
여기, 겨울 아침 흔들며 흘러가는 물소리가 있다 물소리에 섞여 자갈은 굴러가고 강물에 발 담그고 우두커니 서 있는 잿빛 두루미도 있다
강 가장자리에서 반짝이는 얼음빛줄기와 강가를 지키는 댓잎에 걸린 햇살이 시리다
2
여기, 어둠이 번져 얼룩진 유리창에 손을 대면 불 꺼진 거실에서 맴도는 정적이 숨 쉰다 눈 감으면 소리 없이 움직이는 시계 초침 보이고
실금 간 접시에 담긴 타버린 생선이 깨진 믿음과 닫힌 마음 사이에서 일렁거린다
3
오래된 침식과 세월의 뼈, 또는 그 뼈와 강물의 파동 사이 나는 여기 머물고 또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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