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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경 시인 / 너는 여전히 아름답고
바깥의 존재를 사랑하느라 비가 내린다 언제나 커다란 외투를 입고 걷는 쓸쓸한 어두운 빛나는 뚜벅뚜벅 멀어지다가 저벅저벅 듣는 빗소리 시계를 왼쪽 가슴에 넣은 후 다시 태어 나야지 눈부신 듯 덧문을 내리고 텅 빈 테이블 위가 환해진다 투박하던 비의 종아리가 어느덧 상냥하고 나는 불안하다 -시집 <그 오렌지만이 유일한 빛이었네>
조혜경 시인 / 독구
우리 동네 개들은 모두 독구라 불렀다 영삼이네 개도 기중이네 개도 독구였다 영삼이가 도옥구라고 길게 부르면 영삼이네 독구가 기중이가 도옥구라고 부르면 기중이네 독구가 날래게 달려온다는 것 우리들의 독구는 서로 헤어진 줄도 모르고 헤어졌다 독구야라고 불러 대답이 없으면 이별이 된 거다 이별하기에 독구 만큼 쉬운 것은 없었다 독구는 있어도 독ㅈ구 없어도 독구 한 마리 더 있어도 독구였을 뿐 그래서 엄마는 독구라고 했을 거다 엄마도 메리 쫑 해피처럼 이국적인 이름을 그녀석들 위에 내려주고 싶었을 거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픈 이별은 무 자르듯 명쾌하게 독구가 되어버린 거다 오늘은 독구가 새끼를 낳았다 난 그녀석 귀에다 대고 세 번 이름을 불러주었다 메리 메리 메리 너랑 이제 쉽게 헤어지지 않을 거야 독구가 낳은 이별의 말은 이제야 내게서 해방이다
조혜경 시인 / 편의점은 잠들지 못하고
사랑할 때 떠나고 아름다울 때 뛰어내리고 싶어도 나는 늦었네 턱수염 파룻한 녀석들이 침을 뱉네 욕도 침도 반짝이네 오토바이가 지나가네 고함을 지르며 벽 하나를 두고 사람이 죽고 발바닥 반대편 지구에도 사람이 떨어지지 않고 걸어 다닌다네 아무렇지 않게 컵라면을 먹는 밤 캐럴은 홀러나오고 열여덟 살에겐 술을 팔지 않는다는 가게를 지나 눈이 내리네 내리는 눈에서 술맛이 나도 한밤이네 아직은, 거리도 골목도 하얗게 늙어가네 sleep on the floor를 두 시간째 듣고 있네 물을 잔뜩 실은 소방차와 안이 텅 빈 응급차가 지나가도 눈이 내리네 sleep on the floor를 세 시간째 듣고 있네 오늘은 잘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사랑할 때 떠나고 아름다울 때 뛰어내리고 싶어도 sleep on the floor를 네 시간째 듣고 있네
조혜경 시인 / 아쿠아리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컵과 경찰들이 찾아온 저녁을 진술하기 위해 빙하 아래 숨겨진 동네로 이사했지 바다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얼음덩어리를 고향이라 적으면 따귀를 맞겠지, 하지만 사실인 걸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모국어로 수면제를 주문한다 저녁이면 어디서건 외국에 체류하는 느낌이야 캄캄한 골목, 패트롤카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얼음으로 만든 커튼을 치고 그 안에 웅크리지 '몸을 풀었다'라는 말을 쓸 수 있어서 좋아 암컷이라는 주머니, 우린 언제나 사랑할 수 있다 눈썹이 자꾸 짝짝이로 그려지네 욕조 안에서 물장구치는 어린 것들에게 베이비로션을 발라주고 다녀올게, 밖으로 문 잠그고
인간의 바다를 찾아와 자살하는 돌고래들 암컷이었을까
조혜경 시인 / 오후 여섯 시
해지면 어둑해지는 두 손이 보기 싫어 툭하면 월경越境을 하던 너는 날아가는 길을 택한 거야
교수형이 집행된다며 나팔을 불던 백 년 전을 우리는 모르지 오래 고인 슬픔이 시커먼 빛을 글썽이는데
시계탑에 내리는 비처럼 네가 지나갔는지 모르지 더럽고 더러운 강물이 철교를 밀어보듯 꿀꿀 흘러갔을지 모르지
혼자 치는 화투처럼 밤이 올 테지 닮은 그림이라도 뒤집고 싶어 감은 눈 속에 달이 뜰 톄지
-시집 ⌜그 오렌지만이 유일한 빛이었네⌟ 중에서
조혜경 시인 / 완구점 여인
취직을 했네 완구점 여인으로
횃대를 닦고 바닥을 닦고 새장 안에 침대를 넣어주었네 플라스틱 하이힐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미미, 루루, 제니의 이름을 부르며
붉고 푸른 유리반지 팔리지 않네
소리 내지 않는 기타 바람에 흔들리고 검은 색안경 쪼르륵 매달린 벽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검네
바람개비를 쌓아두고 나비의 스위치를 올렸네 오래 오래
돌아오면 잠을 잤네 가격표를 붙이고 스티커 가장자리 때를 지우고 아크릴 케이스에 쌓인 먼지를 하염없이 닦으며
눈 없는 천사가 눈을 달라 했네 내 몸 중 가장 하얀, 발을 달라했네 이상한 천사 내 침대를 쓰기로 했네
충혈될 눈이 없네 걸어가야 할 길도 없네 곁에 앉아 살기로 했네
날갯죽지에 파리가 날아와 앉네 한 송이, 두 송이, 백만 스물 둘, 백만 스물 세 송이의 천사의 몸 온통 검어 나 울지 않기로 했네
저 천사의 몸 검게 흘러내리네 울지 않기로 했네
횃대를 닦고 바닥을 닦고 새장 안에 침대를 넣어주었네 이상한 천사의 없는 이름 부르며
조혜경 시인 / 지친 날개 너에게
그대 쉬었다 가렴 나 비록 줄 수 있는 것 봉지 커피와 따뜻한 물 한잔뿐이래도 네 다친 날개 부러진 꿈 이 눈빛에 씻으러 온 걸 모른 척할 만큼 먼 사인 아니잖아
언제나 네가 밟고선 자리 만족한 적 없었지 높이 날아 화려한 곳에 두 발 얹으려는 마음 누군들 없겠니 하지만 낮은 꿈을 충고하여 이름없는 나무 위의 작은 둥지도 말 않을게 넌 새 깃털로 다시 떠날 테니까 따뜻한 정 한잔 그리울 땐 다시 찾겠지 그래 쉬었다 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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