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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송희 시인 / 무음의 세계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30.
이송희 시인 / 무음의 세계

이송희 시인 / 무음의 세계

 

 

찰칵, 문이 잠기기 전, 나는 나를 열었다

밖으로 빠져나간 나의 검은 기억은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고 바람이 되었을까

 

꿈속에선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고

빗방울은 조용하게 유리창을 때리지만

사라진 말의 행방은 알 수가 없었지

 

희미해진 소리를 따라가는 꿈을 꾸며

멀어져간 고삐를 붙잡으려 할 때마다

더 깊고 고요한 곳으로 자꾸만 미끄러져

 

두 귀가 잠긴 세계, 아늑한 소리의 방

거울을 마주하며 나를 열고 연주한다

누구도 들은 적 없는 내가 오는 소리를

 

-《시조21》 2024. 봄호

 

 


 

 

이송희 시인 / 소나기

 

 

 그녀의 목소리는 흠뻑 젖어 있었다

 

 언젠가, 불현듯, 날 다녀간 그녀가 따귀를 후려치고 도망가던 그녀가 널 믿지 못하겠다며 퍼붓던 그녀가 폭염 사이로 내뱉던 짧은 말들이, 벼랑으로 몰아붙이던 맵디매운 말들이, 어느새 내 몸속으로 스며들던 말들이

 

지독한 열병 속으로 투명하게 갇힌다

 

-시집 <수 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이송희 시인 / AI 쇼핑

 

 

슬픔을 예약했어요

다음 주 토요일로

 

울고 싶은 날이죠

취소는 안 된대요

 

실연의 주인공을 따라

한강변으로 갈게요

 

추가된 옵션으로

웃음을 구매하면

 

자동으로 당신도

업데이트될 거래요

 

또 다른 감정들을 모아

장바구니에 담아둬요

 

-시집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이송희 시인 / 스토킹

 

 

젖은 길 두드리며 종일 비가 내릴 때면

추적추적 누군가 내 뒤를 밟고 있다

소리는 빗물에 섞여 유리처럼 부서진다

 

페이스북 푸른 담엔 처음 본 아바타

당신의 초대장을 열지 않고 삭제해도

새로운 친구추천이 쉼 없이 올라온다

 

창문을 닫을 때마다 새 창이 열리면서

어제의 쇼핑 목록이 와르르 쏟아진다

누굴까,흘깃거리는 저 낯선 방문객은

 

 


 

 

이송희 시인 / 백지의 이면

 

 

호수의 바닥을 말리는 더운 바람

 

입술을 핥으며 안개를 마신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미로를 적시던 혀

 

독한 말이 빈속으로 스르르 들어와

 

가시처럼 뾰족한 한순간을 놓친다

 

당신이 물들인 밤은

물고기처럼 고요해

 

하얗게 질린 눈과 떨고 있는 표정 속

 

몇 번을 머뭇대다 띄우는 메시지

 

어디서 시작해야 하나

이렇게 마른 문장은

 

-《열린시학》 2023. 여름호

 

 


 

 

이송희 시인 / 커튼콜

-자화상을 따라가다

 

 

나는 죽었다 검은 막이 내리고

 

장면이 바뀌자 등 돌리는 사람들

 

그 뒤를 따라가려다 흰 뼈 위로 주저앉는다

 

-<시조21> 2022. 겨울호

 

 


 

 

이송희 시인 / 피아노가 있는 방

 

 

 

남자의 소리는 오래도록 닫혀 있었다

새들의 지저김을

새장 속에 가둬둔 방

복도엔 긴 널빤지만

덜컹대고 있었다

 

남자의 손 마디마디 매듭으로 핀 침묵

그 속에 갇혀서

그는 길을 잃었을까

누군가 부러진 길을 맨발로 걸어간다

 

오선지에 그리던 밤이

소복소복 쌓인다

추억을 두드리며 내리는 겨울 비

손톱은 낮은 음자리

낮달로 돋아난다

 

 


 

이송희 시인

1976년 광주에서 출생. 전남대 국문과 문학박사 학위.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조집 <환절기의 판화> <아포리아 숲> <이름의 고고학> <이태리 면사무소>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대명사들>. 시해설서 <눈물로 읽는 사서함> 등. 2010년 서울문화재단 문학창작지원금. 2009년 오늘의 시조시인상 수상. 2010년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제20회 고산문학 대상. 현재 전남대와 조선대 국문과에 출강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