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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 시인 / 무음의 세계
찰칵, 문이 잠기기 전, 나는 나를 열었다 밖으로 빠져나간 나의 검은 기억은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고 바람이 되었을까
꿈속에선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고 빗방울은 조용하게 유리창을 때리지만 사라진 말의 행방은 알 수가 없었지
희미해진 소리를 따라가는 꿈을 꾸며 멀어져간 고삐를 붙잡으려 할 때마다 더 깊고 고요한 곳으로 자꾸만 미끄러져
두 귀가 잠긴 세계, 아늑한 소리의 방 거울을 마주하며 나를 열고 연주한다 누구도 들은 적 없는 내가 오는 소리를
-《시조21》 2024. 봄호
이송희 시인 / 소나기
그녀의 목소리는 흠뻑 젖어 있었다
언젠가, 불현듯, 날 다녀간 그녀가 따귀를 후려치고 도망가던 그녀가 널 믿지 못하겠다며 퍼붓던 그녀가 폭염 사이로 내뱉던 짧은 말들이, 벼랑으로 몰아붙이던 맵디매운 말들이, 어느새 내 몸속으로 스며들던 말들이
지독한 열병 속으로 투명하게 갇힌다
-시집 <수 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이송희 시인 / AI 쇼핑
슬픔을 예약했어요 다음 주 토요일로
울고 싶은 날이죠 취소는 안 된대요
실연의 주인공을 따라 한강변으로 갈게요
추가된 옵션으로 웃음을 구매하면
자동으로 당신도 업데이트될 거래요
또 다른 감정들을 모아 장바구니에 담아둬요
-시집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이송희 시인 / 스토킹
젖은 길 두드리며 종일 비가 내릴 때면 추적추적 누군가 내 뒤를 밟고 있다 소리는 빗물에 섞여 유리처럼 부서진다
페이스북 푸른 담엔 처음 본 아바타 당신의 초대장을 열지 않고 삭제해도 새로운 친구추천이 쉼 없이 올라온다
창문을 닫을 때마다 새 창이 열리면서 어제의 쇼핑 목록이 와르르 쏟아진다 누굴까,흘깃거리는 저 낯선 방문객은
이송희 시인 / 백지의 이면
호수의 바닥을 말리는 더운 바람
입술을 핥으며 안개를 마신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미로를 적시던 혀
독한 말이 빈속으로 스르르 들어와
가시처럼 뾰족한 한순간을 놓친다
당신이 물들인 밤은 물고기처럼 고요해
하얗게 질린 눈과 떨고 있는 표정 속
몇 번을 머뭇대다 띄우는 메시지
어디서 시작해야 하나 이렇게 마른 문장은
-《열린시학》 2023. 여름호
이송희 시인 / 커튼콜 -자화상을 따라가다
나는 죽었다 검은 막이 내리고
장면이 바뀌자 등 돌리는 사람들
그 뒤를 따라가려다 흰 뼈 위로 주저앉는다
-<시조21> 2022. 겨울호
이송희 시인 / 피아노가 있는 방
남자의 소리는 오래도록 닫혀 있었다 새들의 지저김을 새장 속에 가둬둔 방 복도엔 긴 널빤지만 덜컹대고 있었다
남자의 손 마디마디 매듭으로 핀 침묵 그 속에 갇혀서 그는 길을 잃었을까 누군가 부러진 길을 맨발로 걸어간다
오선지에 그리던 밤이 소복소복 쌓인다 추억을 두드리며 내리는 겨울 비 손톱은 낮은 음자리 낮달로 돋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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