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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 시인 / 우리가 새였을 때
새는 가장자리에 앉는다 여성들이 그러하듯이 만조와 간조, 저물지 않는 파도가 다가오고 물러서는 것을 바라본다 우리가 새였을 때 기억은 그토록 짧고― 우리가 노래할 때 고음역은 유리를 산산조각낼 수 있었으니 새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한순간 어디로 사라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새는 인간의 약점에서 태어나고 우리가 아기일 때까지만 동행할 뿐 걸음을 떼기 시작할 때는 이미 날아가고 없다
이필 시인 / 사슴뿔 그때 나는 대곡천 바위면 밑에 서 있었다 강에서 막 걸어나온 양 떼처럼 그림자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유령이 그림자 사이를 배회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여전히 그의 배고픔이 희미한 향기를 따라 계곡 끝까지 절뚝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것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봄은 다시 나뭇잎 심지에 불을 붙인다 거품이 일고 몸을 뒤틀며 강물이 제 목소리를 되찾는다 인간이 버드나무에 흘러 들어가는 소리는 아름다웠지만 거기서 뭐가 잡힐지 몰랐고 몸 없는 뿔이 신화 속에 살고 있다며 음악이 불어오는 밤의 숲 나는 강가로 내려가지 않았다 불빛 번쩍이는 돌서더릿길로 이어진 암각화 앞에 다시 서지 않았다 그 아래 검은 잿더미를 막대기로 긁지 않았다 어둠이 댐의 두꺼운 수문과 배수로 물소리를 제외한 모든 것을 가져갈 때까지 기다렸다 사냥꾼들이 사라진 그곳에서, 선사의 핏자국이 젖은 풀들을 가로지르는 그곳에서 머리가 몸을 찾다가 결국 영원한 음악이 된다는 밤의 숲에서 숨어서 보고 있었다 붉은병꽃나무 사이로 잠시 움직였지만
이필 시인 / 계단을 내려오는 그림자
(어느 손이 쓰고 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가본 적 없는 모든 장소들을 적기 시작한다 가장 먼 곳부터 시작한다 언제나 살지 않을 집만 짓는다
눈보라 그치고 사람 무리 말고는 없는 텅 빈 도시를 본다 움직이거나 서 있는 서 있는 사람은 오래된 다가구 건물과 같다 죽은 식물로 된 석탄과 피조개 색 벽돌, 손톱으로 판 희미한 낙서 나는 종이처럼 접히는 작은 새를 키우고 있다 접으면 귀가 숨고 접으면 날개가 숨고, 곡선에는 각도가 없다 몸은 오늘의 어깨와 턱을 벗어 던진다 몸이 어떻게 보이든 마음은 흉터를 가지고 돌아온다
죽은 사람은 없다 그저 이름만이 있다
너무 가까워서,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주름의 전개도 배가 인양된다 (그의 마음 안에 어떤 몸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다시 바람의 옷을 입히고 물 위의 제단에 눕힌다 넌 어떤 몸이니, 하고 물으면 거짓말쟁이들은 모두 소리 친다 “오 진정으로…” 더 많은 빛이 어둠 속에서 일어난 일인 것처럼 여행 가방들만 광장을 떠나는 저녁과 노점에 쌓인 먼지 사과들― 사물들이 다수의 의지로 시야를 배분한다 계단을 내려오는 그림자는 모두 이미지로 이 밤을 건 온몸에 눈물방울을 꽂고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유령들
이필 시인 / 소백산
토막불 걸린 솥단지 안쪽에서 누군가 나무 숟가락 휘휘 저으며 별들을 위협한다
그 외엔 구름 한 점 없는 고요
보부상들의 시간
이필 시인 / 빵공장의 비밀
우리는 매일 빵공장에 간다
영하 20도 냉장고 안에서 마스크를 끼고 얼어붙지 않은 말들을 하느라 입김을 다 써 버렸지
컨베이어 벨트에 빵을 얹었는데 우리는 뒤로 걷는 것 같았어, 다시 앞으로 갔다가 되돌아오곤 했지 갔던 곳을 또 가야 했어 집과 공장 사이
무얼 걸려 내려는 건데 그게 무엇인지 아무 이유 없이 우리는 강박처럼 무얼 거르고 벨트를 멈춰 세우고 다시 무얼 거르고 벨트를 멈춰 세우고 다시 무얼 거르고 몇몇은 그냥 제자리에 서서 왔다 갔다 그것을 따라하기 시작했지
체인점은 계속 계속 늘어났고 크레인은 새벽마다 샌드위치 상자를 집어 올렸어 탑차 안에 우리의 반죽은 살아 있고 덜컹거릴 때마다 채소가 칸칸이 정렬되었지
굴뚝은 날이 갈수록 싱싱했는데
금세 물러져서 씻는 방법을 몰라
닥치는 대로 공업용 세제를 붓는 우리의 위생에 대해서 누군가 의문을 제기했는데 깨끗해지기 위해선 누구나 구별되어야 한다고 몇몇이 위생모를 벗었어
그래도 한동안 우리는 웅성거렸는데
근대적 위생은 여러모로 공정한 것이어서 조금씩 잠잠해 갔지
창고를 나가기 전에 갑자기 누군가 눈앞이 안 보인다고 말했어 이물질은 밤새 우리 몸속을 쏘다니다가 너무 환히 표백된 공장 정문 앞에서 구호가 되었지
잠시 캄캄했다가 밝아진 새벽 아무 일 없다는 듯 둘레를 감춘 빵은 유난히 둥글고 선명할 뿐인데 빵공장 트럭들은 전국으로 돌았어
여전히 우리는 매일 빵공장으로 간다
-계간 『문예바다』 (2019년 가을호,공모시)
이필 시인 / 창문의 권리
한 사람이 창으로 몸을 내밀면 몸은 비스듬히 기울어진 가지다 창을 가운데 두고 안과 밖이 생기고, 이윽고 타인의 뿌리가 자랐다 나는 지금 창의 바깥에서 밖으로 뻗어가는 잎사귀를 헤아리고 있다 숨긴 몸을 창 아래로 내놓은 철근이 뚫고 나온 콘크리트에 시뻘건 녹을 피웠다 벽이 있다는 것은 우연(偶然)의 차이, 그러나 안과 밖을 지우지는 않았다 안으로 실려 오는 바람의 안쪽에서 아침저녁 불빛이 켜졌다 꺼졌다 창문의 권리처럼
ㅡ 『시인동네』 (2017, 4월호)
이필 시인 / 최후의 만찬
햄스터 필(phil)은 책장 뒷면에서 발견되었다. 축 늘어진 털 뭉치, 바스러진 좀잇조각이 주변에 소복 쌓여 있었다. 김구용의 모서리를 파먹고 죽었다.
시집은 우연한 상징으로 유해했으리라. 침과 균이 게걸스럽게 뒤섞여 소화되는 가독성 같은 것.
어제 쓰다 만 시는 혀끝에서 텅 빈 맛이 난다. 핀셋으로 사료 한 알을 집는다. 놓친 비유가 굴러간다. 쥐, 커서, 방(房)의 예술적 동맹, 우리의 숨은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솔벤트 냄새에 주둥이를 묻었겠지.
아이스크림을 떠먹고 짝짝 손뼉 치는 아이처럼 최초의 식사는 몇 초간 멈춰
누군가 매일 나의 새벽에 독 한 방울씩 떨어뜨리고 있다.
-《시인동네≫ 2020,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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