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주하 시인 / 멀리서 오는 生
사무치게 걸었다 파묻히지 않으려고 길들은 여전히 정처 없고
미련은 악착같이 밤을 쌓아 놓았다 어떻게 그 많은 생각을 품고 살았을까 모두 나의 것이라니 생이 점점 무거워진다
봄바람을 쪼개어 다시 이곳에 온다면 그때는 아주 작은 풀꽃으로 피어야지 길가 어느 모퉁이에서 머리를 꼿꼿이 치켜들고
부끄럼도 없이 그대를 기다려야지 그때는 마음이 아니라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워야지 단 한 번 다정한 눈빛만으로도 행복해야지
박주하 시인 / 밤
그 봄 내내 입이 열리지 않았다 닫힌 입속에서 시작도 끝도 없는 일들이 무너졌다 폐허에 매몰된 나를 지켜보는 어둡고 고요한 눈 검은 피부에서 흘러나온 그의 눈빛은 외롭고 슬펐다 닫힌 마음의 그림자들 틈에서 하품을 하며 자란 그는 오래 굴린 침묵의 뒤란에 가서 컹, 한번 짖어보는 것 같았다
그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는데 아주 먼 곳에서 달려온 소식처럼 바람의 냄새를 풍겼다 타닥타닥, 서두름 없이 마루를 걷는 그의 발소리가 좋았다 어느 날 아침 정원을 다녀온 그가 나를 세차게 흔들며 눈을 뜨라고 했다 힘없이 늘어진 나의 팔을 끌어당기며 일어나라고 했다 나의 손바닥을 핥으며 밥을 좀 먹으라고 했다 유일한 가족처럼 다정하게 함께 뒹굴며 티비 채널을 돌리고 서로의 숨소리를 찾으며 팔을 베고 잠들었던 그 봄 밥 대신 말 대신 구부러진 시간에 엉켜 살다가 떠난 나의 사랑하는 개 같은
박주하 시인 / 두부를 먹으며
곧은 마음이 아무리 강직해도 배를 열기 전에는 속내를 알 수 없고
뱃속을 열어도 천 길 만 길 떠돌아도 바람의 뜻은 더 헤아리기 어려워라
외로움과 누추하게 마주앉을 때 두부만큼 부드럽게 목구멍을 넘어가던 게 또 있었던가
이렇게 묽어지려고 더 강해지는 길을 이렇게 사려 깊어지려고 흰 정성 한 톨 풀어내는 끈기를 한 알의 콩은 알고 있었으니
고독은 부디 저 가을볕에 몸 섞는 단단한 콩알만큼만 여물어라.
―시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걷는사람, 2021
박주하 시인 / 백 년 여관
백 년 닳은 문턱에 노란 은행잎 한 장이 내려와 묻는다 잘 지내니? 별빛 돋았던 흔적도 낭랑하게 첨부한 뒷심 깊은 안부를 받으니 침묵에도 한계가 온다 우연을 꺾고 싶은 결심마저 도진다 하지만 어긋난 폐허를 더듬어서 어쩌겠는가 잘 지내지는 못했으나 이젠 무엇이 그리 잘 사는 것인지 딥할 일도 아니어서 그저 간절히 묵었던 무덤 같은 방에 들어 백 년 전에 넘어진 구름의 까닭이나 탐한다 늦가을을 풀어 더는 익지 않는 모과 한 알의 사정을 창에 어리는 물방울에 찍어 벽에 기록하는 것이 솔직한 나의 전부, 다만 침묵의 충만함을 뭉쳐서 백 년 후에 다시 찾아들 그림자들 무심히 닦아 허공에 걸어 둘 뿐
박주하 시인 / 꽃잎 위에서 자란 바람에게
오늘은 또 어떤 마음으로 울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너는 장미의 심장을 찢는 법부터 배웠구나 어제의 얼룩을 지우지도 못했는데 오늘 주고받은 수치심들이 어둠에 물들어 갑니다 우리가 배운 가혹한 말들은 심장에서 나왔으나 돌아가는 길을 모릅니다 돌아가도 붉은 꽃을 피울 여유는 없겠지만 하나의 마음을 깊이 알지 못한 죄는 상한 여름밤을 지나갑니다 거리는 이미 낡아버렸고 도처에 자신을 끌고 가는 발소리들이 낯설어지는 이곳 한없는 마음의 겹이 타올랐던 것인데 왜 우리는 늘 서로 다른 말을 듣는 걸까요 당신의 날들은 후회하지 않으려고 돌아갔지만 기억은 처음으로 돌아와 매번 같은 자리를 맴돕니다 앞으로 열 걸음, 뒤로 열 걸음 매일 십자가가 열리는 여름밤 오직 십자가만 보이는 창가에서 가지런히 슬픔을 개고 갱생 중입니다
박주하 시인 / 추신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붉어진 앵두 같은 일
시다 달다 말도 못하고 핏방울 맺힌 혀끝으로만 굴리다가
밤길에 홀로 선 빨간 우체통에 얼굴을 들이밀고
남몰래 중얼거렸지 사랑한다, 너만 알고 있어라
박주하 시인 / 잎 먼저 틔운, 꽃 먼저 피운,
납골당 마당에서 긴급하게 가족회의가 열렸다 부친의 유골은 2층에 봉안되었는데 자식의 뼛가루를 3층에 올리는 것은 불효라고 주장하는 유족들, 울타리를 넘어간 영혼의 행적은 묘연한데 고인의 뼛가루가 남아서 여전히 남은 식솔들을 통섭한다 납골당의 원칙을 내미는 관리인들과 생을 졸한 순서를 따지며 핏대를 세우는 유족들의 대치가 팽팽하다 오래된 벚나무들이 인간의 별난 절차를 경청하며 잎 먼저 틔운 삶과 꽃 먼저 피운, 저들의 생을 배심한다 생사의 위계질서가 설왕설래하는 마당에 산벚의 꽃잎들이 하얗게 흐드러 지고 겹친다 죽음이란 어쩌면 지는 저 꽃잎처럼 가볍고, 아름답고, 무정한 일 멀리 간 사람은 입을 잃었으니 지나가는 바람의 목이나 한번 죄어 볼 뿐, 꺾이지 않는 가족이란 말이 가죽처럼 질기다 고인의 여정이 끝나도 끝난 게 아니어서 마지못해 불멸을 생각한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천양희 시인 / 감정의 가로등 외 6편 (0) | 2025.12.30 |
|---|---|
| 김화순 시인 / 불량한 하루 외 6편 (0) | 2025.12.30 |
| 김지헌 시인 / 7월 외 5편 (0) | 2025.12.30 |
| 신경림 시인 / 개미를 보며 외 6편 (0) | 2025.12.29 |
| 조태일 시인 / 수갑 외 6편 (0) | 2025.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