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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양희 시인 / 감정의 가로등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30.
천양희 시인 / 감정의 가로등

천양희 시인 / 감정의 가로등

 

 

나는 하루에 10만 번 뛰는 심장을 가졌고요

하루에 1만 7천 번의 생각을 일으키지요

내일은 내일의 생각이 떠오를 테지만

오늘은 생각이 마음을 종처럼 부리지요

이때의 생각은 마음의 거처

생각은 엎드려 절받지요

생각해보세요

생각 한번 잘못하면 신세 망친다는 것을요

생각의 그림자는

월요일처럼 길어요

수시로 변하는 생각은

구름처럼 뿌리가 없지요

(얘야, 이제 생각 좀 그만하렴)

 

생각해보니 꽃봉오리야

이제 네가 꽃 필 차례다

네 생각이 꽃피울 차례다

 

 


 

 

천양희 시인 / 그림자

 

 

마음에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마른 가지 몇개 분질렀습니다

그래도 꺾이지 않는 건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오솔길에 듭니다

바람 부니 풀들이 파랗게 파랑을 일으킵니다

한해살이풀을 만날 때쯤이면

한 시절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나는 그만 풀이 죽어

마음이 슬플 때는 지는 해가 좋다고

말하려다 그만두기로 합니다

오솔길은 천리로 올라오는

미움이라는 말을 지웁니다

산책이 끝나기 전

그늘이 서늘한 목백일홍 앞에 머뭅니다

꽃그늘 아래서 적막하게 웃던 얼굴이 떠오릅니다

기억은 자주 그림자를 남깁니다

남긴다고 다 그림자이겠습니까

'하늘 보며 나는 망연히 서 있었다'

어제 써놓은 글 한줄이

한 시절의 그림자인 것만 같습니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2021.

 

 


 

 

천양희 시인 / 세상을 돌리는 술 한잔

 

 

포도주를 들다 생각해본다

나는 너무 썩었고 오래 썩었다

발효된 내 거대한 심통(心筒)에

묵은 찌꺼기 누추하다

나는 속썩은 인간으로서 냄새를 피웠고

말 대신 게거품을 물었다

몸속 어디에

포도송이 꽉 찬 포도밭이 있는지

넝쿨이 굽은 뼈처럼 뻗어나온다

마음의 서쪽, 붉게 취한 노을 어룽거려

찔끔, 눈물도 나온다

이 머리통, 나도 생각하는 사람이라

여기, 어디에 도계(道界)는 있는지

술 한잔 돌리면서

내가 귀의한 세상에게

할 말이 있다면

내가 세상을 술잔처럼 돌리고 싶다는 것이다

한잔의 순환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이다

포도주를 들다 생각해본다

나는 너무 썩었고 오래 썩었다.

 

-시집 [마음의 수수밭], 창작과비평사, 1994.

 

 


 

 

천양희 시인 / 몽돌

 

 

학동해변에 앉았는데

나는 마치

플로베르가 평생 잊지 못한 운명의 여인을 만난

노르망디해변에 있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파도는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혼잣말로 중얼거릴 뿐입니다

여름 바람은 단단하고 팽팽한 것이

성깔이 있는 듯 파도를 밀면서

해변에 있는 자갈들을 들었다 놓습니다

자갈들은 자기들끼리 이리저리 부딪치며 가라앉습니다

바람과 햇빛으로 한생을 지나는 사람들은

생활처럼 알지요 또다시 파도가 밀려오면

잠시 파도에 들어올려졌다 자기들끼리

몸을 부대끼면서 또 가라앉습니다

서로 부대끼면서 저렇게

둥근 돌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오늘

파도 소리에 부대끼면서

내게 남은 유일한 질문은

서로 부대끼면서 저렇게 모난데 없는

몽돌이 될 수 없을까, 하는 것입니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2021.

 

 


 

 

천양희 시인 / 하루는 하나의 루머가 아니다

 

 

새벽이 왁자지껄 길을 깨운다 가로수들이

벌떡 일어서고 눈에 불을 켜고 가로등이

소의 눈처럼 끔벅거린다 땅은 꿈쩍 않는데

차들이 바쁘다 발을 구른다 구를수록 눈덩이처럼

커지는 하루 구르는 것이 하루의 일이라서 일의

속이 오래 덜컹거린다 어둠 속이든 가슴속이든

속은 들수록 깊어지나 바깥은 하루살이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진다 지는 것들은 후기(後記)가

없다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고 말할 뿐이다 나는

왠지 세상에서 서늘하여 지는 해를 붙잡았다

놓는다 잘 보내고서 기억하면 되는 걸 그러면

되는 걸 하루가 천년 같다고 생각해본 사람들은

안다 하루는 하나의 루머가 아니다 오늘 하루는

내가 그토록 살고 싶은 내일이다

 

 


 

 

천양희 시인 / 사소한 한마디

 

 

1920년 뉴욕의

어느 추운 겨울날

가난한 한 노인이 "나는 맹인입니다"

작은 팻말을 들고

공원 앞에서 구걸하고 있었다

몇 사람만 동전을 던지고 갈 뿐

그를 눈여게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때 한 행인이

맹인 앞에 잠시 머물다 떠났다

그뒤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맹인의 적선통에 동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엇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마음을 돌려놓은 것일까

팻말은 다음과 같은 글귀로 바뀌어 있었다

"봄은 곧 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봄을 볼 수 없습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마음을 크게 벌었던 것이다

 

*알브레 브르통의 글

 

 


 

 

천양희 시인 / 푸른 노역勞役

 

 

바람은 잘 날이 없어 어쩌면

목 놓은 소리로 헤매는 게 아닐까

 

나무는 흔들리는 것이 참을 수 없어 어쩌면

뿌리 깊이 버티는 게 아닐까

 

나는 어쩌면

에고의 몸무게를 빼지 않아 무거운 게 아닐까

 

나에게는 아직도 써야 할 바람이 있고

꽃 피어야 나무 이름을 아는 몽매蒙昧가 있다

 

이건 어쩌면

지독한 나의 푸른 노역이 아닐까

 

 


 

천양희(千良姬) 시인

1942년 부산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 1965년 박두진 추천 시 '정원(庭園) 한때'로 '현대문학'등단. 1983년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으로 작품활동 재개, 시집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너무 많은 입」 등, 짧은 소설 「하얀 달의 여신」, 산문집 「직소포에 들다」 등. 1996년 소월시문학상을, 1998년 현대문학상, 2005년 공초문학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