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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화순 시인 / 불량한 하루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30.
김화순 시인 / 불량한 하루

김화순 시인 / 불량한 하루

 

 

 불량한 하루예요 날이 저물듯 기념일은 돌아오고 해가 뜨듯 국경일이 와요 일요일은 못 본 책처럼 책장에 쌓여가요 나는 두꺼워진 얼굴을 벗고 잠자리에 들어요 도시의 별들은 제 빛을 잃고 달빛처럼 창백해요 베란다에 버려진 결단은 앙파처럼 썩어가고 설거지통에는 하루치의 연민이 쌓여 있어요

 

 불온한 사랑이에요 상상력이 멈추면 속이 훤히 보이거든요 사랑을 찾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거예요 사랑을 알게 될 즈음 우린 헤어져 건너편 별로 건너가지요 그래도 월요일은 오고 꿈은 쌓여가요 재활용 함에 쑤셔 넣은 사랑을 다시 입을 수 있을까요 신념은 서랍 속에서 조금씩 무너져요 시간은 용병처럼 힘차게 걸어가고 나는 점점 다리에 힘이 빠져요 아침을 깨우는 비둘기 울음은 광고의 배경음처럼 익숙해요

 

 불량한 하루예요 길 가다 영화관에 들러 무뚝뚝한 영화를 보고 팸플릿을 챙겨요 오늘도 내 귀는 종일 사소하고 밋밋한 것들을 모아요 지나치는 것의 등을 힐끗, 바라보는 나날들 오늘도 나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요 내 안 재미없는 과거를 세고 있는 문장들 내일을 아는 하루가 태양 아래 반짝여요 그래도 아침은 오고 어제는 절뚝이며 걸어가지요

 

-시집 『구름출판사』에서

 

 


 

 

김화순 시인 / 껄무새

 

 

오늘도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한다

며칠에 한 번씩 껄껄껄 울어댄다

 

잘 할 껄, 안 그럴 껄, 배워둘 껄,

잘 해드릴 껄, 잡을 껄, 그때 살 껄· · ·

 

망설이다 후회하고

놓치고 탄식하고

같은 말을 되뇌다 웃어넘기고

위로받지 못한 시간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내 품에 들지 못한 채

과거에만 사는 새

 

선택받지 못한 시간들은

내일도 울어댈 껄?

 

-『문학과창작』 2023-봄(177)호

 

 


 

 

김화순 시인 / 아주 오래된 책

 

 

빗소리를 적는 영국사 은행나무

누천년 동안 집필 중인 고서

 

빗방울 떨어질 때마다 글자들 바닥에 쌓인다

사유의 무게로 어깨 내려앉았다

 

구름과 바람과 햇살이 무장 무장 쓰인 책갈피

가을이 책장을 넘기며 바랜 시간을 읽고 있다

 

햇살 아래 녹아내린 이카루스의 전언들

부은 발등 수북이 계절을 복기하고 있다

 

나무 그늘에 들어 내 그림자를 벗어버리자

내 안을 점거한 무형의 시간들 쏟아져 나온다

 

겹겹이 주름진 불안이 서서히 퍼진다

내가 썼던 글들은 나무 아래 흩어진 한 잎의 낙엽 일 뿐

 

도리 없이, 대책 없이, 여지없이 불려 나오는

나를 읽는다

 

 


 

 

​김화순 시인 / 살찐거짓말

 

 

이곳은 상상으로 광합성을 하지

돌고래가 시그니처 휘슬로 존재를 알리듯

숲은 시간이 증발할 때마다 귀엣말을 속삭이지

눈에 촛불을 켜고 천천히 걷다보면

삐걱거리는 어둠 너머 제인 에어의 공포가 보이고

수시로 지워지는 길 위에서 여우를 만나기도 하지

나는 라임 오렌지 나무 아래 누워

이야기의 여백인 숲의 침묵을 듣기도 하지

유리창을 향해 돌진하는 핀치새처럼

시간 저편으로 흩어지는 속수무책의 언어들

 

이끼 식물 가득한 겹겹의 그늘로 들어서면

서로 껴안은채 무섭도록 침묵하는 입술들

한 번도 햇볕 아래 나온 적 없는 이야기들

후두둑, 날아오르지

나는 박쥐처럼 매달려 기억의 가장자리를 오가며

머리로 몰리는 피의 시간을 즐기지

머리카락 풀어헤치고 폭풍의 언덕을 뛰어다니며

불온한 사랑을 꿈구지

지도에도 없는 발길을 찾아다니는 애

책없는 발걸음

 

우주 끝까지 씨를 퍼트리는 이 숲에서

나의 욕망을 가지고 노는 이는 누구인가

나를 세상의 책에 써 놓은 손은 누구일까

더듬거리며 앞선 걸음을 딛고 가는 나에게

살찐 거짓말은 커다란 위안이지

힘센 이야기는 나를 여야야금 살게 하지

열매 한 알 온전히 내어주지 않지만

오늘도 나의 케렌시아*로 무작정 나서 보는 미봉

책의 시간들

 

*케렌시아/ 나만의 공간이자 피난처, 안식처를 뜻함

 

 


 

 

김화순 시인 / 땀 흘리는 풍경

 

 

 허기진 시간이 오후의 정수리 위를 어른거리고 집을 나선 사람들 자꾸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어요. 긴 침묵의 에스컬레이터 따라 지하 2층 찜질방에 가면 햇빛 차단한 일상 무뇌아로 누워 있어요. 수족관 관상어처럼 느릿느릿 유영하는 사람들, 헐거워진 생의 비늘 툭툭, 땀방울로 털어내고 밌어요.

 

 생각 익히며 고열의 맥반석방에 누워 있거나 비디오방 촉수 낮은 불빛 아래 가위눌리거나 땀구멍으로 출감되는 젖은 욕망들, 소금방의 암염으로 꾹꾹 눌러 절여요. 눈치 챌 수 없도록 맞물린 정교한 어긋남이 서로에게 편안한 배경이 되어주는 풍경. 식은 밥 같은 모래시계 속 하루가 공회전할수록 사람들 꼬리 붉은 방어가 되요.*

 

*「詩經」에 나오는 周南의 시 「汝墳」중에서

'방어꼬리 붉고/ 정치는 불타는 듯 가혹하다'에서 차용. 방어(백성)는 피곤하면 꼬리가 붉어진다고 한다.

 

 


 

 

김화순 시인 / 상자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넣을 수 있지

유기의 추억이나 살인의 기억은 물론

꿈이나 사랑이 담기기도 하지

 

상자 안에서 사과의 시간이 흘러나와

달콤새콤 싱그런 하루가 되기도 하고

죽음의 냄새가 흘러나와

잊혀진 악마와 대면하기도 하지

 

아빠보다 택배상자를 더기다리는 아이들

배달된 사랑은 아이와 함께 자라지

상자를 열면 달려와 그 안으로 들어가 앉는 유기견 치키

함께 버려진 체온과 허기를 기억하는 걸까

상자에 유기된 시간이 그리운 걸까

 

나도 삶이라는 상자 속 아파트 상자에 유기된 지 오래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나는

상자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상자가 되었지

버려진다는 것도 때로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윤기 나는 목록 중 하나

 

상자가 신비로운 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것

상자 속에는 또 다른 상자가 있다는 것

그 안에 무엇이 들었나에 따라

기억은 새롭게 편집되지

 

 


 

 

김화순 시인 / 스케노포이에테스 덴티로스트리

 

 

 1.

 훨훨 저무는 마른 꽃잎들

 저 검은 통점이 거느린

 날개만큼의 그늘 아래서

 다시 못 볼 사람을 생각한다

 

 2.

 내연산엔 내연을 가진 그림자들 가파른 돌에 기대 서 있다 내 사연도 푸른 허공 골똘히 흔들고, 두툼한 초록 손바닥은 새벽 어시장의 경매인처럼 비밀스런 수신호를 보낸다 아직 꽃송이를 달지 못한 배롱나무 앞에서 나는 꽃 그림자 되어 웃어 본다 매끄러운 햇살 너머 여울지는 것들 꽃받침의 아픈 시간이 카메라에 토막토막 되감긴다

 

 파파팟, 새소리가 물수제비를 뜬다 나는, 머리카락 몇 개 뽑아 계곡 아래로 던지며 어서 물어가라고 새에게 소리친다 흔들리는 날

 갯짓에 검게 포섭되는 나무들 나는, 바람의 영토에 아무도 모를 내연의 영역 하나 물들이고 싶은 거다 스케노포이에테스 덴티로스트리라는 새처럼

 

- 시집 『시간의 푸른 독』 중에서

 

 


 

김화순 시인

서울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2004년 《시와 정신》 신인상으로 등단. 고려대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시집 『사랑은 바닥을 쳤다』 『시간의 푸른 독』 『구름출판사』. 논문집 『김종삼 시 연구』. 현재 고려대에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