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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헌 시인 / 7월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30.
김지혜 시인 / 달콤한 무기

김지헌 시인 / 7월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

옆집 은행나무 두 그루가

사랑을 하고 있나봐

 

숨가쁜 호흡이 들려

 

잔뜩 귀 기울이다

더 가까이 가 보았더니

시치미 뚝 떼고

잔기침 소리만 내고 있잖아

 

짓궂은 생각이 들어

툭툭 건드렸더니

하늘 한쪽 기울여

가장 깨끗한 햇살 파편들을

눈 못 뜨게 쏟아 붓잖아.

 

 


 

 

김지헌 시인 / 화살나무 뼈

 

 

달콤한 젤라또 한 숟가락 떠먹는다

말에 찔려 죽을 지경이다

 

앞발을 높이 쳐들고 솟구쳐 오르는 말을

젤라또와 함께 부리나케 삼킨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단칼에 보내버릴 수도 있는 말에

뼈가 있었다

입밖으로 나오는 순간 무색무취의 치명적 독이 될 수도 있는

말이 씨가 된다는 말

 

알사탕처럼 입안에서 굴리다 애써 누른 것

이것이 시라고 우길 때도 있었다

 

젤라또를 또 한 숟가락 떠먹는다

달콤한 젤라또를 한 페이지씩 넘기며

부드럽고 달디단 말이란 어떻게 생겼을까

화살나무 잎이 붉다는 것

마음을 훔쳐내는 것인데

목구멍으로 치솟는 말을 삼켜버린다면

무엇으로 당신의 심장을 뛰게 할까

 

 


 

 

김지헌 시인 / 곤드레밥

 

 

봄에 갈무리해 놓았던

곤드레나물을 꺼내 해동시킨 후

들기름에 무쳐 밥을 안치고

달래간장에 쓱쓱 한 끼 때운다

강원도 정선 비행기재를 지나

나의 위장을 거친 곤드레는

비로소 흐물흐물해진 제 삭신을

내려놓는다

반찬이 마땅찮을 때 생각나는 곤드레나

톳나물,

아무리 애를 써도

조연일 수밖에 없는

그런 삶도 있다

 

 


 

 

김지헌 시인 / 가지가지

 

 

보라는 내가 좋아하는 맛

가지가지의 맛을 가진

텃밭에 그려 넣기에 좋은 단순한 장난감

 

스스로 가지를 잘라내는 나무는

위로만 오르겠다는 집념으로

뿌리의 들끓는 역사를 잘라버리기도 하지

천 가지 만 가지 모순도 이길 수 없는 가지의 맛

 

공중에 그물을 깁는 가지

가지들 출렁일 때마다 별들이 우수수 쏟아지는

별들이 맛본 가지의 맛

직박구리들 아침마다 난장을 치는 가지의 맛

햇살에 내어 말리면 더욱 쫄깃해지는 가지의 맛

 

언젠가 보랏빛 장난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자 남자아이들이 웃었다.

그 순간의 기억이 선명하다

 

세상의 가지가지 맛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태양 아래 탐스럽게 맺혀 있는

반질반질한 감촉을 가진

때로는 대지를 향해 축 늘어질 줄 아는

비굴함조차 평화로운 가지의 맛

 

 


 

 

김지헌 시인 / 움

 

 

흙 속에 묻어두었던 뿌리가

죽을 힘 다해 움을 틔워낼 때

그 움이라는 말

 

맵차던 지난겨울

스티로폼 박스에 갈무리 해 놓았던 대파

그 하얗고 탱탱한 속살에서 뻗어 나온 줄기가

맵고 아리던 생의 기억 숨긴 채

샛노란 새싹 움 틔울 때

세상에 대하여 단단히 채비한 게 분명하다

 

움이라는 말

볕도 안 드는 음지에 밀쳐두었던 묵은 화분에서

어느 날 노란 대파 줄기 쑥 올라올 때

뱃속의 아기가 첫울음으로 문 열어젖히듯

첫 씨앗이 씨방을 찢고 나오듯

움이라는 말은 얼마나 힘세든가

 

묵은해를 빨리 버리고 싶었던 걸까

여기저기 새해 덕담이 소란스럽다

 

봄의 움은 태양의 힘으로 자라지만

겨울 움파는 묵은해의 기운으로 자란다

추운 겨울을 버티는 힘이란

묵은해의 뿌리에서부터 오는 것

묵은해 뿌리의 매운 성깔로

세상을 당차게 밀고 갈 수 있는 것

 

움딸, 움쌀, 움집, 움짤, 움트다……,

존재만으로도 소소하고 따뜻한

움이라는 말

 

 


 

 

김지헌 시인 / 모시나비의 사생활

 

 

이른 봄 현호색과 모시나비

꽃이 피고 지는 찰나의 눈맞춤 끝

손톱만한 보라색 꽃잎에

사랑의 결실을 남겼다

암컷엔 정조대를 씌워놓아

일부종사하도록 치밀하게 단속해 놓았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고 했던가

저것은 치정일까 숭고일까

태양 아래 애면글면 하기는

나비나 인간이나 매한가지

 

간절히 서로에게 몰입하는 동안

온 우주가 숨죽이고 모른 척 해주듯

오늘 너의 조용한 날갯짓

가볍고 단단한 내공으로

내일 지구 어디쯤 큰 바람 일으켜

세상을 흔들어 놓을지 모르는 일

 

나붓나붓

마냥 가벼워 보이는 날갯짓도

알고 보면

평정심을 가장한 침묵의 독심술일지도

애벌레는 전심전력 제 속도대로

한 생을 밀고 갈 것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김지헌 시인

1956년 충남 강경 출생. 수도여자사범대학 과학교육과 졸업.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다음 마을로 가는 길』 『회중시계』 『황금빛 가창오리 떼』 『배롱나무 사원』. 제13회 미네르바 문학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사무총장으로 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