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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일 시인 / 수갑
천만번이라도 손목을 내밀마. 그 손목도 부족하다면 발목이라도 내밀마 그 발목도 안 된다면 모가지라도 내밀마 그 모가지가 약하다면 몸뚱어리째 내밀마 이 몸뚱어리 성한 데가 없어 옭아매지 못한다면 좋다, 좋다, 숨결이라도 내밀마. 터럭 난 너의 손아귀 앞에 아아, 내 최후의 눈빛이라도 내밀마
조태일 시인 / 꽃나무들
헐벗을 날이 오리라 바람부는 날이 오리라 그리하여 잠시 침묵할 날이 오리라
겨우내 떨리는 몸 웅크리며 치렁치렁한 머리칼도 잘리고 얼어붙은 하늘 향해 볼 낯이 없어, 피할 길이 없어 말없이 그저 꼿꼿이 서서 떨며 흔들리리라
푸름름을 푸름을 모조리 들이마시며 터지는 여름을 향해 우람한 꽃망울을 준비하리라
너희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너희들은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고 너희들은 형님을 형님이라 부르고 너희들은 누나를 누나라 부르고 동생을 동생이라고 처음 부르던 이땅을 부둥켜 안고,
결코 이 겨울을 피하지 않으리라 결코 이땅을 피하지 않으리라. 이 곳 말고 갈 수 있는 땅이 어디 있다더냐
헐벗을 날이 오더라도 떨 날이 오더라도 침묵할 날이 오더라도
조태일 시인 / 겨울에 쓴 자유서설(自由序說)
1
우리들의 눈은 허름한 날품팔이의 일거수 일투족에서 이 시대의 눈물을 본다. 우리들의 입은 뚜껑 덮인 청계천처럼 더럽고 컴컴한 야간 완행열차를 바다로 끌고 가 파도 끝에다 함성을 보태고
우리들의 귀는 닫아도 닫아도 거듭 열려서 말 못 하는 침묵을 듣기도 한다.
2
어느 비린내 나는 시장 모서리 포장도 없이 썰렁한 싸구려 음식점에서 이십 원짜리 멀건 수제비 한 사발과 깍두기 두어 점으로 배를 채우고 험란한 팔다리를 끌며 생활을 찾아 일어서는 우리들의 형님과 누나들
웅크리고 있던 겨울 바람도 일어나 윙윙거리며 따라 나선다
3
간(肝)이 콩알만해지는 우리들의 메마른 땅 우리들은 두서없는 말이라도 뿌린다.
기왕에 두서없는 땅 순서가 뒤바뀌어서 뿌리가 하늘로 솟는 땅
솟아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하나님께 비나이다
우리들의 머리 위로 내닫는 고압선 고압선 고압선을 우리들 목에 걸어 주시옵소서
발버둥치며 이 땅의 구석구석을 더운 가슴으로 더듬으며 이 겨울을 불 지피며 기어다니리니.
조태일 시인 / 성에
신새벽 문득 깨어 일어나니 흰꽃들이 유리창에 어른거린다.
지난밤 창 밖의 고향에선 무슨무슨 사연들이 있었길래 이토록 허연 소문으로 피어났느냐
눈부신 창 밖이 보인다, 들린다.
어렸을 적 헤엄치며 놀았던 저 극락강이 얼다 얼다 열이 나 깨어져 성엣장들이 서로의 몸들을 어루만지며 하염없이 떠내려가는 모습이, 성엣장들이 몸들을 부딪치며 강 끝으로 끝으로 떠내려가는 소리가.
조태일 시인 / 그리운 쪽으로 고개를
어린 날 고향의 양지바른 쪽 다투며 뛰놀던 햇볕들 흙 한톨, 돌멩이들.
어린 날 고향 가득히 쏟아지는 달빛, 별빛들과 다투며 떨어지던 알밤들. 그 소리들, 어린 짐승들의 숨소리들.
그 작고 고만고만했던 꿈들, 지금 어디서 얼마만큼 자랐나, 어린 날의 콧물과 눈물과 함께 훌쩍거리나.
조태일 시인 / 연날리기
잠결인 듯 매운 칼바람에 취해 대낮인데도 답답해서 어지러울 땐 겨울 언덕에 선다.
아니 남산 꼭대기면 어떻고 인수봉이면 어떠라. 국회의사당 옆 한강 고수부지면 어떻고 설악산 백담사면 어떻고 밤낮 없이 달이 뜨는 망월동이면 어떠라.
칼끝 같은 바람에 오장육부가 다 드러난다 해도 다스운 눈동자 서로 포개며 연을 날리자. 욕심도 티끌도 미움도 죄다 실어 악악 악을 쓰며 연줄을 끊어 버리자.
그 끊어진 연줄을 타고 오는 말로만 무성한 임을 만날 수 있다면 잠결이면 어떻고 대낮이면 어떠랴, 처음으로 만나는 임만 있다면
조태일 시인 / 단 한 방울의 눈물
단 한 방울의 눈물은 내 유년시절 즐겨 옷 벗던 실개천이었다가 들판을 굽이치는 강물이었다가 바다였다가,
그 아무도 모를 일이어라 가뭄에 목 타는 모든 풍경들 위에 쏟아지는 소나기가 되어 지쳐 누워 있는 산들을 일으키다가 엎어진 들판을 다시 뒤집다가
어느 날 밤은 캄캄한 숲들과 함께 울음바다로 출렁이다가 다시 내 눈에 잠시 들어 쉬다가
깨어나라 깨어나 걸어라 내 발들을 찍는 도끼였다가 빌고 비는 손바닥에 땀으로 솟았다가 천지를 뒤덮은 연기였다가 아스라이 스러지는 마지막 별빛이었다가 오늘은 함박눈으로 내린다. 잠이 없어 뒤척이는 세상의 자장가로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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