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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시인 / 패각의 성자 생은 일찍이 남에게 빌붙으면 구차한 것이라 그 어디에 빌붙어도 괴로운 것이라 집과 관 사원을 한 몸에 얹고 달팽이가 간다. 몸이 사원이라 몸을 벗어나는 것이 세속의 길이라며 고통이 따를지라도 불사하듯 제 몸에 제 몸을 폭약을 재우듯이 재우며 간다. 아무리 인생이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가도 그 끝이 관이라는 것을 알므로 이미 관을 얻은 몸이므로 한 치를 한 뼘을 가도 유유자적 여유가 넘쳐나는 것이다. 식탐이 식욕이 얼마나 세상을 망치는지 알아 풀잎 몇 장으로 자급자족이고 생의 자초지종마저 만족이라 그 어디에도 구차하게 굴지 않으려 허기를 최소한의 풀잎으로 지우고 득과 덕을 쌓는 성자여 집과 관과 사원으로 삼위일체를 이룬 성자여 패각의 성자여, 홀로 세상에 나서서 길을 간다. 느리면 느릴수록 깊어지는 사색의 깊이 느리게 가면 갈수록 선명하게 다가오는 세상 오, 그러다 멈추니 몸은 스스로 깨달은 황금빛 사원이다. 생이 구차한 건 구차한 것에 매달린 탓 끝내 사랑이니 생마저 불멸에 매달리려는 안간힘이므로 가다가 말아도 그만, 가지 않아도 그만인 우주 유한과 무한을 씨줄과 날줄로 짜진 우주라 존재했던 것, 존재하는 것, 존재할 것들이 불멸이라며 우주를 이루는 불멸이라며 이미 우주와 한 몸이 된 듯 집과 관과 사원을 얹은, 얻은 패각의 성자 패각의 우주, 저기 천천히 가고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25년 12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그립다, 세고비아 기타 소리 기억한다. 저 집에서 흘러나오던 세고비아 기타 소리, 세고비아 기타 소리의 부드러운 리듬을 타고 와 마당에 핀 가난한 꽃의 살림살이를 뒤져 꿀을 훔쳐 가던 팔랑팔랑대던 나비, 그립다. 세고비아 기타 소리, 세고비아 기타를 치던 동네 형의 긴 손가락, 기타를 친다는 이유만으로, 딴따라가 되면 집안이 망한다 해, 가족이 집을 비우면 치던 세고비아 기타, 세고비아 기타 소리에 물들어, 노랗게 뚝뚝 지던 꽃, 여름밤 바닷가에 화톳불 피워 놓고 조용히 치던 세고비아 기타, 비포장도로 같아 덜컹거리던 세월, 누구나 멀미하며 괴로운 듯 울음을 게워 내던 세월, 세고비아 기타 소리는 위로였지. 꿈을 탄주해 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지. 지금도 그리운 세고비아, 세고비아 기타 소리 *시집 『백석과 보낸 며칠간』(천년의시작, 2023)에 수록된 작품으로 문예지에 미발표한 작품으로 재수록함.
-웹진 『시인광장』 2025년 6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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