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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해인 수녀 / 사랑의 이름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9.
이해인 수녀 / 사랑의 이름

이해인 수녀 / 사랑의 이름

 

내가 하늘 위에 쓴 이름들은

바다가 읽고

​바다 위에 쓴 이름들은

하늘이 읽고

참 많은 이름들이

구름으로 파도로 꽃으로 피어납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들을

항상 새롭게 부르며

나의 일생이 지나갑니다

오늘의 나를 키워 준

사랑의 이름 앞에

고맙다는 말 외엔

할 말이 없습니다.

 

 


 

 

이해인 수녀 / 6월의 시

 

 

​하늘은 고요하고 땅은 향기롭고 마음은 뜨겁다

6월의 장미가 내게 말을 걸어옵니다

사소한 일로 우울할 적마다

"밝아져라" "맑아져라" 웃음을 재촉하는 장미

삶의 길에서 가장 가까운 이들이 사랑의 이름으로

무심히 찌르는 가시를 다시 가시로 찌르지 말아야

부드러운 꽃잎을 피워 낼 수 있다고

누구를 한 번씩 용서할 적마다

싱싱한 잎사귀가 돋아난다고

6월의 넝쿨장미들이

해 아래 나를 따라오며 자꾸만 말을 건네옵니다

사랑하는 이여

이 아름다운 장미의 계절에 내가 눈물 속에 피어 낸

기쁨 한 송이 받으시고 내내 행복하십시오

 

 


 

 

이해인 수녀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바로 당신의 "얼굴”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눈 부신 태양은,

바로 당신의 "미소”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별은,

바로 당신의 "눈”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노래는,

바로 당신의 "콧노래”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붉은 노을은,

바로 당신의 "뺨”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풋풋한 과일은,

바로 당신의 "입술”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날씬한 사슴은,

바로 당신의 "목”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나무는,

바로 당신의 "어깨”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들녘은,

바로 당신의 "가슴”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바람은,

바로 당신의 "손길”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춤은,

바로 당신의 "발걸음”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설레는 약속은,

바로 당신과 "만남”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은 소리는,

바로 당신의 "숨소리”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갖고 싶은 보석은,

바로 당신의 "마음” 입니다.

 

변함없이 함께 해주는 당신이 있어

언제나 나는 행복합니다.

 

 


 

 

이해인 수녀 / 기다림

 

때가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밝고 둥근 해님처럼

당신은 그렇게 오시렵니까?

기다림밖엔 가진것이없는

가난한 이들의 마음에

당신은 조용히 사랑의 태양으로 뜨시렵니까?

기다릴 줄 몰라 기쁨을 잃어버렸던

우리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며

이제 우리는 기다림의 은혜를 새롭게 고마워합니다

기다림은 곧 기도의 시작임을 다시 배웁니다.

마음이 답답한 이들에겐 문이 되어 주시고

목마른 이들에겐 구원의 샘이 되시는 주님

절망하는 이들에겐 희망으로

슬퍼하는 이들에겐 기쁨으로 오십시오

앓는 이들에겐 치유자로

갇힌 이들에겐 해방자로 오십시오

이제 우리의 기다림은

잘 익은 포도주의 향기를 내고

목관악기의 소리를 냅니다

어서 오십시오 주님

 

 


 

 

이해인 수녀 / 눈물 항아리

 

 

어머니 그리울 적마다

눈물을 모아 둔

항아리가 있네

 

들키지 않으려고

고이고이 가슴에만 키워 온

둥글고 고운 항아리

 

이 항아리에서

시가 피어나고

기도가 익어가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빛으로 감싸 안는

지혜가 빚어지네

 

계절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

이 눈물 항아리는

어머니가 내게 주신

마지막 선물이네

 

 


 

 

이해인 수녀 / 봄의 연가

 

 

우리 서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

 

겨울에도 봄

여름에도 봄

가을에도 봄

 

어디에나 봄이 있네

 

몸과 마음이

많이 아플수록

봄이 그리워서

봄이 좋아서

 

나는 너를

봄이라고 불렀고

너는 내게 와서

봄이 되었다

 

우리 서로

사랑하면

 

살아서도

죽어서도

 

언제라도 봄

 

 


 

 

이해인 수녀 / 봄 햇살 속으로

 

 

긴 겨울이 끝나고 안으로 지쳐있던 나

봄 햇살 속으로 깊이깊이 걸어간다

내 마음에도 싹을 틔우고

다시 웃음을 찾으려고

나도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눈을 감고

들어가고 또 들어간 끝자리에는

지금껏 보았지만 비로소 처음 본

푸른 하늘이 집 한 채로 열려 있다

 

 


 

이해인(李海仁) 시인

1945년 강원도 양구 출생. 본명 : 이명숙. 필리핀 성 루이스 대학 영문학과 졸업. 서울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 1964년에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세례명: 벨라뎃다, 수도자 이름: 클라우디아). 입회 이후 '해인'이라는 필명으로 천주교 발간 잡지《소년》에 작품을 투고 시작. 1968년에 첫 서원, 1976년에 종신서원. 1976년에 첫 시집인 《민들레의 영토》를 발간.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부산 가톨릭대학교 교수. 1981년 제9회 새싹문학상. 1985년 제2회 여성동아 대상. 1998년 부산여성 문학상. 2006년 천상병 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