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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 시인 / 12월
저녁이라서 좋다 거리에 서서 초점을 잃어 가는 사물들과 각자의 외투 속으로 응집한 채 흔들려 가는 사람들 목 없는 얼굴을 바라보는 게 좋다 너를 기다리는 게 좋다 오늘의 결심과 망신은 다 끝내지 못할 것이다 미완성으로 끝내는 것이다 포기를 향해 달려가는 나의 재능이 좋다 나무들은 최선을 다해 헐벗었고 새 떼가 죽을 힘껏 퍼덕거리며 날아가는 반대로
봄이 아니라 겨울이라 좋다 신년이 아니라 연말, 흥청망청 처음이 아니라서 좋다 이제 곧 육신을 볼 수 없겠지 움푹 파인 눈의 애인이 창백한 내 사랑아 일어나라 내 방으로 가자 그냥 여기서 고인 물을 마시겠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널 건드려도 괜찮지? 숨넘어가겠니? 영혼아 넌 내게 뭘 줄 수 있었니.
김이듬 시인 / 겨울 휴관
무대에서 내려왔어 꽃을 내미네 빨간 장미 한 송이 참 예쁜 애구나 뒤에서 웃고 있는 남자 한때 무지 좋아했던 사람 목사가 되었다 하네 이주 노동자들 모이는 교회라지 하도 괴롭혀서 도망치더니 이렇게 되었구나 하하하 그가 웃네 감격적인 해후야 비록 내가 낭송한 시라는 게 성직자에게 들려주긴 참 뭐한 거였지만
우린 조금 걸었어 슬며시 그의 딸 손을 잡았네 뭐가 이리 작고 부드러울까 장갑을 빼려다 그만두네 노란 코트에 반짝거리는 머리띠 큰 눈동자는 내 눈을 닮았구나 이 애 엄마는 아마 모를 거야 근처 미술관까지 차가운 저녁 바람 속을 걸어가네 휴관이라 적혀있네 우리는 마주 보고 웃다가 헤어지려네 전화번호라도 물어볼까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할 거라 하네
서로를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 서로 뜻밖의 사람이 되었어 넌 내 곁을 떠나 붉게 물든 침대보 같은 석양으로 걸어가네 다른 여자랑 잠자겠지 나는 쉬겠네 그림을 걸지 않은 작은 미술관처럼
김이듬 시인 / 권할 수 없는 기쁨
내 친구는 스피드광 오토바이 레이싱을 즐기는 사람 그런 그가 사고를 당했다 지리산을 한 바퀴 돌아 나한테 놀러 오겠다더니 자동차를 들이받아 오토바이는 박살났지만 자기 몸은 전혀 다치지 않았다며 껄껄 웃는다 하늘로 붕 날아오르는데 그물 같은 게 받쳐주는 것 같았다며 타고난 바이커란다
전화 끊고 저수지 주변을 서성거린다 수위를 조절할 수 있으면서도 열렬히 그런 건 없을까 피로 물든 바위틈 고원의 당나귀든 상인의 낙타든 모래알에 이르도록 걸으리 묵직하게 새 한 마리 날아오른다 검은 얼음판 위에 앉아 있던 새 날개가 있는 슬픔
퇴화한 다리 아래 높은 곳으로 떨어져 죽어 가는 예감 날 수 있어서 날아야 하니까 버려지지 않는 능력 때문에
김이듬 시인 / 꽃다발
축하해 잘해봐 이 소리가 비난으로 들리지 않을 때
누군가 꽃다발을 묶을 때 천천히 풀 때 아무도 비명을 지르거나 울지 않을 때 그랬다 해도 내가 듣지 못할 때
나는 길을 걸었다 철저히 보호되는 구역이었고 짐승들 다니라고 조성해놓은 길이었다
김이듬 시인 / 나는 세상을 믿는다
밤에 걸어도 골목길을 가만히 누가 뒤따라와도 나는 믿는다
꽃필 것을 믿고 그 지독한 냄새와 부스러기에 과민증이 도질 것을 믿는다 흐드러진 흰 꽃의 가치는 스러지는 데 있고 꽃나무 아래 하얀 목덜미를 젖힌 소녀에게 무자비한 사랑이 주어질 것을 믿는다
가구와 수집품을 밖으로 끌어내고 커튼을 뜯어 젖히고 네 마음을 건드린 소리와 색채에 묻혀 있던 내 몸뚱이를 보라 사랑이여 무엇을 숨기고 있었는지
나는 믿는다 오늘의 뉴스를 믿고 유랑극단을 믿고 노래와 서커스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믿는다
어떤 음악도 독서도 나를 방해하지 않고 철거반도 폭격도 내 식사를 망치지 않는다 사랑아, 너는 파리처럼 날아왔다 떠날 것이다 대충 이러다 멈춰줄 걸 믿는다
뜸하게 물을 줘도 꽃은 피고 물 주지 않았는데 흙에서 반쯤 나와 피어나는 꽃도 있다 그런 꽃일수록 끔찍하다 마스크를 쓰고 밖으로 빠져나간다
어두운 골목에서 빠져 나온 강도가 어쩌면 기다리던 애인일지도 살인은 멈추지 않고 강간은 끝나지 않고 전쟁은 더더욱 치밀해질 것이다 우리는 충분치 않은 과오를 나누고 끝내 나아지지 않은 채 사라질 것을 믿는다
김이듬 시인 / 몽유도원
불 꺼진 방이 편하다 혼자 먹는 저녁과 말 붙이지 않는 이웃들 텅 빈 우체통 오지 않는 전화에 아무 느낌이 없다 여기 오래 살 것처럼 아주 오래전부터 살았던 것처럼 베를린 변두리 작은 방에서 나는 이곳에 아무렇지도 않다 십오 주 동안 창밖의 사과나무가 변하는 동안 진초록이 옅어지다 엷어지다 연두가 아니라 붉은 색이 되는 구나 그 사과가 하루하루 붉어 가는 동안 해는 짧아진다 오늘 낮은 더웠다 눈동자가 하늘색인 한국학과 학생들에게 한국시에 나오는 정화수를 설명하는데 그게 정화조에 담긴 물이냐는 질문에 장독대 어쩌고 하다가 시간이 끝나 버렸다 내가 칠판에 우물을 그린 후 그 물이 정화수가 되는 신비를 그림으로 그려주고 있어도 여기 애들은 정확하게 시계를 보고 나가 버린다 목이 타서 정화수라도 마셔 버릴 것 같은데 수도에서 석회수만 나온다 슈퍼 입구에 수박을 쌓아놓고 팔던데 못 사먹고 있다 수박이 천도복숭아만 하다면 좋을 텐데 통째 썰어도 혼자서 다 먹을 수 있게
김이듬 시인 / 일요일의 세이렌
다독여 모셔놓았던 눈사람을 냉장고에서 꺼냈습니다. 그땐 왜 그랬을까요? 모든 독신자와 모든 걸인들과 모든 저녁의 개들에게 묻습니다. 가르쳐주시겠어요? 이 허기는 살아 있는 동안 끝날까요? 늦봄, 양손에 쥔 한 덩이씩의 눈을 주먹밥처럼 깨물며 이상한 사이렌 소리를 듣습니다. 댐이 방류를 시작합니다. 강가의 사람들은 신속히 밖으로 나가주십시오. 진양호 댐 관리소에서 알려드립니다. 사람들은 들었을까요? 내 방은 강에서 멀리 있는데 물 빠진 청바지 같은 하늘엔 유령들이 득시글거립니다. 가르쳐주세요. 눈사람처럼 내 다리는 하나로 붙어 광채를 띤 채 꿈틀댑니다. 나는 어느 바다로 흘러갈까요? 혼자 그곳에 갈까요? 손바닥에서 입에서 흘러내리는 이것이 한때 머리였는지 몸통이었는지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나는 왜 지금 막 사라진 것들에만 쏠릴까요? 부르면 혼자 오시겠어요?
김이듬 시인 / 상강
그는 내 방에 세 들어산다. 내가 사는 옥탑방엔 방이 두 개인데 약간 더 좁고 깊숙한 방에 그가 세 들어 산다. 지금까지 그를 찾아오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의 직업도 불분명하다. 나는 캐묻지 않는다. 집 안의 소등 상태에도 완전히 어둡지 않은 옥상에서 그는 치마를 펄럭거리며 빙빙 돈다. 흐릿한 달빛 아래로 그 미치광이는 추락했다. 내 옥탑방 문을 열면 두꺼운 빨랫줄에 냉소처럼 하얀 치마가 펄럭거린다. 그 너머엔 텃밭이 있다. 그가 심은 해바라기가 거무스름하게 말라비틀어져 있다. 샛노랗던 해바라기 대가리가 흙에 닿을락 말락 꼬꾸라졌으나 줄기는 쓰러지지 않아 몹시 추하다. 어디서 왔는지 까치가 낮게 날고 있다. 어떤 날은 세 마리, 또 어떤 날은 대여섯 마리, 까치가 내 해바라기 대가리 아래로 부리를 넣고 씨앗을 쪼아 먹는다. 거의 모조리 빼먹었다. 가지 않기로 했어. 나는 미련함 빼면 시체이기 때문에 그를 기다린다. 그가 따뜻한 죽을 가지고 올 것이다. 이제 죽을 사 와도 소용없지만 절대적 암흑은 없지 않은가. 달빛은 흐릿하고 내 몸은 투명하며 싸늘하다. -계간 『시의 시간들』 2024년 가을호 (창간호) 발표
김이듬 시인 / 블랙 아이스 눈발은 눈이었을 때 아름답다 쌓인 눈이 눈석임물 되었다가 얼어붙으면 가장 위험하다
눈이 그쳤는지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본다
설원이 녹고 있다 도로와 개펄이 드러난다 항구 기능을 상실한 저 월곶 포구에는 아침 어시장이 열릴 것이다
아침, 눈, 엄마 에밀리가 좋아하는 단어들을 나도 좋아한다
엄마 빼고는 여기 다 있다
에밀리는 기지개 켜다 말고 베개를 껴안으며 말한다 “오늘은 찾을 수 있겠지? 나랑 닮았겠지? 죽진 않았겠지?”
이 친구는 포틀랜드에서 입양 기록 갖고 엄마 찾으러 한국에 왔다
어제는 에밀리가 내민 지번 주소 들고 그의 부모 댁을 찾아갔지만 삼미시장으로 변한 거리만 확인했을 뿐 우리는 40여 년 전의 시간을 찾을 수 없었다
난생처음 한국에 온 에밀리와 난생처음 시흥에 온 나는 을씨년스러운 시내를 온종일 돌아다녔다
폭설이 쏟아지기 시작한 건 마전저수지 사거리에서 에밀리가 양팔을 벌린 채 돌다가 웃다가 넘어진 건 해가 질 무렵
“히죽거리며 말하지 마, 에밀리!” “그럼 울어야 되겠어?”
뜨거운 물에 빨아 널어 둔 장갑은 수축되어 작고 어제 입었던 스웨터는 여태 축축하다 작년에 룸메이트가 던진 말이 떠오른다 실수로 놓고 가는 줄 알고 챙겨 준 물건들이었다 버리기는 그렇고...... 너 가져 갖기 싫으면 버려 줘
사람 마음만큼 잘 변하는 게 있을까 희고 부드러운 눈발 같았다가 녹으면서 성질이 변한다
철이 들어 나의 엄마를 찾아갔을 때 엄마는 새엄마보다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까 딸을 버리고도 그리움이나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차갑고 미끄러운 길이 펼쳐져 있다 “눈이 그쳐서 더 추울 거야 장갑도 껴 눈길보다 살얼음판이 더 위험해”
에밀리가 태어난 곳을 향해 간다 생후 8개월 동안 살았던 곳을 향해 춤을 추듯 걷는다 어딘지도 모르면서
모텔 주차장에서 나오던 검은 승용차가 반 바퀴 돌며 도로를 벗어난다
누구였는지 알 수 있을까 왜 그랬는지 물어봐서 뭐 할까
범인을 잡는 데 회의적인 소설 속 형사는 이해가 되지만 회의적인 가이드이자 친구로서의 나는 우리의 행방을 모르겠다
실제로 가긴 간다 미끄럽고 거무스레한 길로 태어나려면 거쳐야 하는 통로 같다
만나 봐야 좋을 게 없을지라도 한 번 더 버려질지 모르지만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까마득히 모를 곳으로 -계간 『창작과 비평』 2024년 봄호 발표
김이듬 시인 / 아르누보는 왜 의자들과 관계 있는가
젓는 것과 흔드는 것의 차이를 말씀드릴까요? 내가 셰이킹 하는 모습을 보며 휘파람 부는 사람이 있고 칵테일이 맛있기를 기대하는 사람도 있죠. 팔이 아플까 봐 걱정하는 사람이 저기 구석자리에 있는 걸 알아요. 그는 언제나 롱아일랜드아이스티를 주문하죠. 낡은 마루처럼 민감한 사람들의 반응, 그래 봤자 차이는 의자 간격 정도죠.
퍼포먼스가 아니에요. 나는 이 밤의 바에서 칵테일을 파는 사람. 팔이 빠져라 흔들고 섞고 저으며 적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마리골드는 구역질나게 썩는 냄새를 피워 벌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죠. 하지만 어제 죽었어요. 나는 이 화분을 안락의자 위에 올려 둡니다.
운명은 운명적이지 않고 예술은 예술적이지 않아서 나는 의자들을 수집합니다. 어깨가 아픈 사람을 등받이가 긴 의자에 앉히고 만취한 사람은 벤치에 눕혀요. 약을 한 내 동료는 경찰에 잡혀 갔지만 약을 팔고 성매매 한 클럽 주인은 오늘 헬스장에서 셀카를 찍죠. 나는 의자를 들고 아무도 내리찍지 않아요.
사람들이 의자로 보인 적 있나요? 예쁜 병에 든 알록달록한 잼을 좋아하세요? 시체와 고기를 혼동하지 않고 만찬의 가지런한 식기들, 즉 큰 스푼, 포크, 나이프, 작은 스푼, 포크 따위를 활용한다면 제 말을 이해할 겁니다. 의자의 품에 안겨 의지를 내려놓은 적 있습니다.
둥그런 방석이 필요 없습니다. 의자 위에 의자를 겹쳐 두고, 의자 사이에 의자를, 의자의 머리를 의자 다리 사이에, 그러다가 나는 의자를 뒤집어 놓고 생각합니다. 의자를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구애가 없고 질투가 없는 다자연애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아르누보라는 이 바의 보증금이 얼마였던가? 발을 뗄 때마다 마룻바닥이 내려앉고 있는데 카펫은 멀쩡해요.
태양이 어둠의 궤양처럼 보이고 승리가 참패와 비슷한 이름으로 보이지 않나요? 엉덩이의 종양처럼 터져서 나는 의자 위에 서서 천장을 두들겼어요. 패러디를 좋아하지 않고 비아냥거릴 처지도 아닙니다. 단지 창문이 하나 필요할 뿐이죠.
나는 전철역보다 광장보다 높은 천장을 보려고 해요. 셰이커를 흔들면서 내 머리 위에 걸려 있는 유리잔의 수만큼 많은 창문들을 상상합니다.
길고 지저분한 바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마주 앉아 있어요. 지하철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이들처럼 가려는 방향이 반대지만 이따금 당신은 바를 넘어옵니다. 굴러오는 피넛처럼 저절로.
나는 언제나 바에 다리를 올린 발레리나처럼 태연하지만, 밤거리의 의자들처럼 서 있지만, 아이들을 죽인 부모처럼 라일락나무 아래 소녀를 강간한 아저씨처럼 종종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나를 차단한 인간적인 친구를 당일보다 오늘 더 사랑하듯이, 이곳에는 사랑을 나누는 의자가 무수히 많고 모두가 돈에 약에 취했어요. 나는 날마다 술을 만드는 쇼를 하지만, 아무리 흔들어도 얼음은 깨지지 않아요. 한순간도 한 방울도 녹지 않아요. 아무리 팔을 휘저어도 꿈이 깨지 않아요. 썩는 나를 데리고 나가지를 못해요.
웹진 『문장』 2019년 6월호 발표
김이듬 시인 / 여름에 애인이 있다면 아침 일찍 카페에 가지 않겠어 카페 문 열릴 때까지 서성이다가 콘센트가 있는 구석 자리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겠어
한여름에 애인이 생긴다면 집에 당장 에어컨부터 달겠어 나의 밝은 방으로 그를 초대하겠어 같이 마트 가서 고등어를 골라도 재미있겠지
하지만 애인을 찾을 수가 없네 둘러보면 유쾌하게 떠드는 사람들뿐이야 내가 다정해보이지 않는 건 알아 만약 내가 식물이라면 내부에 붉은 꽃을 피우는 과야 저기 혼자인 이는 온라인게임만 하고 있군 말을 붙일 찬스도 없네
“이렇게 나이 먹은 사람이 오실 데가 아니잖아요.” 마주 앉은 이가 찡그리며 말했지 우연히 부킹한 것 뿐인데 친구 부부 따라 춤추러 간 것뿐인데
그날 샴푸나이트클럽 사이키 조명 아래에서 그도 내 또래로 보였는데 인간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 젊게 생각하지
아, 여름날 애인이 있다면 밤새 춤을 추겠어 물속에서도 원피스 안에 수영복 입고 지금 당장 해수욕장 달려가겠어 잠자지 않고 밥 먹지 않아도 헤엄치며 신나겠지
저녁 때가 가까우니 카페 손님들이 해변 피서객처럼 빠져나가네 음료 한 잔 더 주문해야 눈치가 덜 보이겠지 아, 무화과깜뺘뉴는 왜 이리 비쌀까
여름에 애인이 생긴다면 카페에서 죽치며 우스꽝스러운 시를 쓰지 않겠어 -웹진 『시인광장』 2024년 8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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