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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양미 시인 / 아쉬탕가 하는 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8.
박양미 시인 / 아쉬탕가 하는 밤

박양미 시인 / 아쉬탕가 하는 밤

 

무얼 하나 생각하다

무얼 하다가 죽을까까지 갔다

빨리 돌아와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생각은 자꾸 무얼 하나에서 죽을까로 샌다

새는 건 습관 같아서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채

허리가 길어지고

새어버린 길이 원래 내 길이었을 지도 모르는데

생각하면 호흡이 편해지고

새어 나온 마음이 두꺼워진다

나를 밤새 게 한 건

샷 추가 말라바르 커피였는지도 모르지

새까맣게 태운 원두 같은 밤

온난화와 멸종 동물 걱정으로 밤이 새면

녹아 흐른 가슴은 빙하가 되고

이름이 사라지는 것들로 생물도감이 텅 비어간다

비어간다

바닥난다는 가까운 동작이어서

바닥은 더 낮은 자세에 어울리고

가랑이 사이 머리를 넣고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아쉬탕가

거꾸로 보는 하늘에는

사라진 얼굴들이 돌아오고

삐걱대는 생각과 생물 사이로 이름들이 쏟아지고 있다

 

-사이펀 2024 가을호

 

 


 

 

박양미 시인 / 사릉에서 사랑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 가벼운 일

네 개인 줄 알았지

생각 思에 가슴이 찔려

걸을수록 마른 물이 흐르고 있어

생각의 자리로 넘지 못하고

그림자 지는 걸 보지 못했지

 

푸른 침을 촘촘히 꽂은 소나무들은

바람의 방향으로 허리를 비틀고

 

붉은 기둥 곁을 맴돌던

이름 없는 혼들이

오방색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어

 

달빛 없는 능침 아래

머리카락은 검게 자라고

하얀 뼈들이 가지런히 누워

수백 년 깨지 않는 꿈을 꾸고 있네

 

금낭화 꽃주머니 수를 세거나

석마가 달릴 수 있나 내기하면서

가벼운 웃음만 흩어진 벤치

 

피기 전에 지는 것을 먼저 배워서

 

매일 툭 툭 지는 마음은

붉고 붉은데

 

뒤돌아 나오다

누워 있는 꽃을 밟고 말았지

 

사릉에서 사랑을 말하는 것은 너무 무거운 일이라서

​-웹진 『시인광장』 2024년 8월호 발표​​​​​​​​​

 


 

 

박양미 시인 / 영월

 

텅 비어 아무것도 아니었다

1월이 시작되기 전

새 달이 돋기 전에

아무 것도 없을 때

아무 것도 아닐 때부터

돌개구멍으로 수억 개의 물이 들고 나고

무른 혀가 무딘 돌의 몸을 만드는 일

시름을 삭히고 되돌아가지 않는 일

일월 앞에 자리하는

영월은 오지 않고

동강 동강 물을 건너

사람의 물길이 끊어지다 멈추고

요선암 벼랑 아래

얼굴 없는 그림자만 서성이는데

일월도 2월도 기다리지 못하고 영월만 덩그라니

없어서

비어서

차지 않아서

수억 개의 빈 달이 뜨고 지는

가슴 속 구멍에 바람을 품게 되었다

그곳을 지나온 후

너는 달라져 있었다

 

 


 

 

박양미 시인 /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바다가 있다

몽돌 같은 방언들이 구르는 해변에서

언어들은 둥글어지는데

모르는 말들이 발에 걸려도 알아들을 수 있다

썬크림은 녹아내리고 햇볕이 익어간다

사람들이 파도를 탄다

파도는 사람들을 타고 있다

하얀 어께를 밀며 타고 있다

당연한 밀물도 타당한 썰물도 없는 해변에서

헹가래를 치는 바다

밟을수록 발가락을 삼키는

오늘과

내일의 언덕에서

말들이 성을 쌓는다

발에 묻은 해변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아서

모래 무덤이 되었는지 모른다

떨어지는 것은 마음의 간격이 넓어지는 것

파도는 언제까지 이어지는 걸까

몽돌의 방식으로 바다를 표현하지만

해변은 바다를 잃기도 한다

사람들이 하얗게 밀려간다

 

 


 

박양미 시인

서울 출생. 2023년 계간 <서정시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서정시학회 동인. 문전성詩 동인.  전)레코텍 코리아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