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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인 시인 / 굴참나무 연대기
잎마름병 참나무를 베어내고 나니 반백년 묵힌 말이 한목에 쏟아졌다
딱따구리 입질이 절벽에 세웠던 집 그 구멍에 깃들 만하다는 소문이 돌았을까 굴뚝새 박새 딱새들이 깃털을 남긴 채 떠나갔다 동심원 하나가 마을의 내력을 새기는 동안 몇몇의 이름도 함께 사라졌다
태풍이 후려친, 그 여름 곳집을 관리하던 술 취한 바우 아제가 만가도, 상여도 없이 섶다리와 함께 떠내려갔다
동천 할아버지 쯧쯧 혀를 차셨다 먼 길 떠나는데 상여는 한 번 태워줘야지
좋아하던 막걸리도 아끼지 마라
빈 상여 곡소리 따라 당산나무를 돌고 돌던 만가와 나의 이불 속 겁먹은 송별사와 폭포 아래 소에 말려버린 소년도 제자리 등고선에 기록되었다
어느 추운 톱날이 건들다 간 곁가지엔 중풍 든 노인처럼, 부름켜가 말꼬리를 흘리며 찌그러져 있다 그 촘촘한 곡선에선 가물었던 계절을 밟고 간 봄의 뒤꿈치와 수박화채 같은 그늘의 갈채소리 먼 산불에 놀란 숲의 심장박동소리를 들었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물고 숨어버린 겨울 숲의 적막과 얼어붙은 여러 해 날씨까지 뭉뚱그려 새겨놓은 굴참나무 연대기는 죽은 후에야 읽게 되는 담담한 진술서다
박정인 시인 / 낮잠
질레꽃이 절정이어서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고요가 달아나 버린 내 창밖에 찔레꽃 심어 두는 걸 잊고 있었네 낮달마저 빛바래어 천지간이 하양다 벌들 잉잉대며 꽃가루 굴리는 동안 향기 번지는 기척에 눈앞이 흐려지고 새들이 우는데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하얀 초막 한 채가 깊은 잠에 빠진 한낮 봄비가 아니면 누가 저 곤한 오수를 깨울 수 있으랴
녕쿨 아래, 뱀이 독을 품고 지키는 것도 적막인 것을
박정인 시인 / 은목서는 은목서의 말을 하고
은목서는 은목서의 말을 하고 금목서는 금목서의 말을 한다 나무들의 웃음이거나 울음인 향기 수신인을 숨긴 편지가 되어 얼굴을 가리고 내게 온다 통역이 필요 없는 나무들의 나라 목서와 물푸레나무 곁에서 편지가 열쇠가 되어 국경을 넘어선다 잠들지 않는 개울을 건너 구름 달 별까지 향기를 날라 사람 마을 흉터들 말갛게 지워낸다 바람 흔들어대는 꽃잎의 힘
-월간 《춤》, 2025년 1월호
박정인 시인 / 이소離巢
행장이라면 거무죽죽한 총 한 자루 뿐
나의 주식主食은 필사의 속도를 지녔다 느닷없는 허기는 잡식으로 떼우지 입맛이 새콤달콤해지는 날 과육을 찾을 때처럼
먹이를 찾다 보면 집터가 다져지고 집터를 파다 보면 성찬을 얻는다 나무 비늘 밑 날것들을 한 방에 제압하려면 총구에 집중해야 해
속사포처럼 부리를 잘 쏘아야 나를 믿는 애인이 생길 테니까
설골*은 우리 종족만의 고유한 유산 나의 두통에 대한 당신들의 염려는 불필요한 편견
숲속의 일상은 순간처럼 날카로워서 느슨하게 살아야 진짜 위험할 때 덜 억울하다
내가 식재료를 향해 총부리를 겨눌 때도 맹금들은 바위에다 제 부리를 갈지 그러거나 말거나 몰래 스미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아 나는 굉음을 내며 둥치의 절벽에 집을 짓는다 검푸르게 지워지는 밤의 정적 속에서는 사랑도 겁에 질려
네가 그리운 날엔 함께 하고 싶은 시간을 나 혼자 탕진하곤 해
내 집 좁은 출구는 널 기다리는 다초점 망원랜즈 그 안에서는 혼자 노는 캄캄한 문이 따로 열리고 숨죽인 안락이 말을 터오지
네가 만일 내게로 와 준다면 반클리프 목걸이 대신 부드러운 내 가슴털을 뽑아, 깔아줄게
부리에 실금이 갈 때까지 널 위해 필사의 속도로 쏠게
* 설골: 혀뼈, 두개골을 감싸고 있어 뇌의 충격을 막아준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7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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