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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수 시인 / 연애를 삭제하다
부팅된 헛된 그림자로 욕정의 몸이 더워질 때 빠른 걸음에 뛰쳐나와
허공을 건너고 도로를 횡단하고 빌딩 유리창에 부딪쳐 깨어지고
쳐들어온 정염을 들켜버린 날은, 몽롱한 잎들 땅바닥에 뒹굴다 다투어 젖은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홀연히 증발된 파일로 잊어버리는 능력이 물들 때
삭제 버튼을 누르자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린다
끝내 재수 없는 것.
안녕 나의 연애여
2021년 계간 <미네르바> 등단작품 이은수 시인 / 갈매기 편의점
강물이 꼬깃꼬깃 구겨지기 시작했어 성급한 문장이 나왔다가 없어지기도 했지 진탕 놀고 간 흔적이 하얗게 쓸어놓고 시치미를 떼고 있어
재갈매기 소리에 잠시 바다에 온 것 같은 착각 비어 있음의 가득함이 멈춘 시간을 파헤쳐 허공에 풀어 놓은 거야
두근거림의 윈드서핑이 바람과 놀아날 때 고래의 꼬리도 소리를 내기 시작했어
펄떡거리는 그리움은 아예 없지만 한때 은빛 반짝임은 흔적 되어 접근 금지
기억에 또아리 틀고 있던, 실뱀을 슬그머니 내려놓자 구겨진 파랑으로 들어가 버렸어
솟아오르는 물의 계단으로 비밀은 올라가고 새처럼 뛰어 올라 허공에 발자국 하나 젖은 기억을 마르게 하는 거지
편의점 앞 빨간 우편함엔 고독이 잠들어 시간이 거꾸로 박혀 있고 -날 건들지 마세요
물낯에 어른거리는 갈매기는 날갯짓으로 날아가고 포토그램에 투영된 미혹의 순간들
후루룩 날아가거나 가라앉은 부유물은 서성거리다 탈각된 모서리 말들이지
침묵보다 못한 낱말들이 윤회로 휘저어지는 건 가끔 어딘가 고장이 나는 언어의 한계였던 거야
-꺅 꺅 끼룩 끼룩
이은수 시인 / 문상
그녀의 몸은 병이 지나가는 길이었다 지나가면서 쉬기도 하고 때로는 넘어지기도 했다
어떤 놈은 아예 들어앉아 살림을 살면서 새끼를 기르기도 했다
그 동네 태양은 새까만 색이었는데 독한 그을음을 뿜어내기도 했다
검은 태양이 솟는 날은 그래서 저승 가는 날이었다
늦게나마 가신 방향이 맞는다는 듯이 흰 국화만 몇 송이 겸연쩍게 서서 배웅하고 있다
고요가 심장을 찌른다 그의 고인 눈물 속에 어른거리는 절룩거리는 미혼의 딸
병실에서 가져온 그녀의 신발 질기게 걸어왔을 닳은 신의 한 귀퉁이는
짧은 다리를 대신하여 허기진 발로 살아갈 딸의 가슴에 얼룩져 걸려있다
<동시> 이은수 시인 / 눈빛
꽃눈도 눈빛이 있어,
그 눈빛에 바람도 고분고분.
그 눈빛에 햇볕도 고분고분.
이은수 시인 / 투신하는 노을을 건지다
아직은 그림이 끝나지 않았어 그리기를 멈추려는 건 마음이 변해서지
바람의 길을 내주는 돌담의 틈이 끓어오르는 몸의 열기를 식히지만
바람의 몸살로 노랗게 변한 장미는 그 쨍쨍한 가시가 여전해도 제일 먼저 뽑히고
어떤 의식儀式으로도 떼어놓기 힘든 묵은 이별이
탄식의 하늘로 투신하는 저녁 불그레한 엷은 노을이 펼쳐질 때
번뇌의 날개 자락 퍼덕이며 그 남자마저 그려야 할 일
그림이 모서리에서 숙성하고 있는 사랑은 이제 막 시작인데,
하늘의 가장자리에 물들어가다가 되살아나고 있는 상심이 벼랑으로 우뚝 서서 맹독을 뿜어내고 있다.
- 『링크를 걸다』 미네르바 시선 067
이은수 시인 / 링크*를 걸다
시간이 내리막길을 같아 멀리 달아났다고 생각했어 한껏 부정이 팽창된 시간이었어 이제는 아무 거리낌없이 홀가분하다고 자유롭게 마음을 놓아 주었다며 좋아했지
익숙함은 태만으로 시간을 너덜거리게 해 중력은 꼬리가 달려 있어 기억을 쉽게 잃어버렸지
메시지 한 줄에, 그 많던 초침과 시침과 달력의 날짜들이 재빠르게 되돌아오면서 그때 그 자리에 서 있어
한나절은 족히 지난 말이 쭈뼛거리며 손을 내밀어 생의 바깥에서 안을 속살거리고 멈춰 있다는 건 착각
나비의 푸른 지문들이 손끝에서 흐르고 불안하게 날개를 퍼덕여
아, 이렇게도 빨리 어긋난 운명이 되었지
잠깐씩 흐려졌다 밝아진 틈을 톺아보니**
울컥, 첫 마음에 링크를 걸어준 거야
*정보 통신 두 개의 프로그램을 결합하는 일. ** 틈이 있는 곳마다 모조리 더듬어 뒤지면서 찾는다는 순우리말.
이은수 시인 / 시를 읽거나 쓰는 이유
우리 모두는 항상 좋은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이거나 착한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시를 읽는다 어쩌다 시를 쓰기도 한다 시인은 아니다 부끄러움은 알고 다른 사람의 속마음도 알기 때문이다 다만 더 따뜻한 마음을 가지라고 아파도 별 볼 일 없는 것 같아도 모두 다 항상 의미 있는 순간들이었음을 시가 건네준 찰나의 위로가 긴 시간을 견디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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