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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유미 시인 / 나는 시인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8.
허유미 시인 / 나는 시인

허유미 시인 / 나는 시인

 

 

걱정해줘서 고맙다

남자는 통화 마지막에 늘 이렇게 말하고 먼저 끊었다

집안 정보를 얻기 위해 전화를 하고

경조사에 못 간다고 전화하고

찾아뵈어 용돈 드리기 귀찮아

일 년에 몇 번씩 물어도

저장 해두지 않는 계좌번화를 묻기 위해 전화할 뿐인데

내 위치에서 남자에게 할 수 있는 폭력이었는데

남자는 폭력에 희고 푸른 페인트를 칠하고

담장을 쌓아 내내 바라보았다 한다

이가 빠지면 담장 아래 심고

바람이 세게 불면 담장 아래 피하고

나의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

남자의 나의 남자이기를 기대하지 않았고

나는 아직 남자의 여자로 전화를 하기 때문이다

나긋한 아우성이였다

남자에게 폭력을 당했던 날마다

남자에게 폭력을 가한 날마다 기념으로 나는 시를 썼다

한 번도 내 남자였던 적이 없는 남자가

시의 전부다

 

 


 

 

허유미 시인 / 게우젓

장맛비도 오래 맞으면

겨울 폭설처럼 몸살을 앓는다

몸살에 온몸이 아파도 어디가 아픈지 몰라

마음 짚다 사랑이 사라진 자리 찾아내고

빈자리가 깊은 줄을 그제야 알아

장맛비가 발길질처럼 아픈 줄 그제야 알아

몸을 부르르 떤다

 

그런 날은 꼭 게우젓을 먹어라

깊은 곳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숨을

너에게 먹인다

몸살에 아무데도 마음 쓰지 말고

게우젓만 생각해라 오늘 게우젓

만드는 법을 잘 보고

마음 빈자리에 넣어라

 

바다 속에서 숨은 참아도 그리움은 못 참아

물을 삼켜 코가 찢어질 듯 아프고

눈앞에 캄캄할 때

게우젓 먹일 욕심으로 물 밖으로 나온다며

울먹이며 입 안에 넣어주려다 엄마는 자기 입에 먼저 넣는다

 

게우젓 맛이 이정도다

 

죽기 전에 게우젓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준다더니

오늘 만든 게우젓이 엄마 유언 같다는 생각을 하며

울먹이다 게우젓 흘리자 날름 주어 입에 넣는다

 

게우젓 맛이 이 정도이다.

 

슬픔이 한가롭다

웹진 시인광장202310월호 발표

​​

 


 

 

허유미 시인 / 본래

 

 

이것은 새와 나 사이의 거리

 

노트 속에서 새들이 날아오른다

 

둥글다는

다가오는 말일까

멀어지는 말일까

 

접시 위에 노른자 무리들이

군무를 펼치고 있다

 

식탁 위 양념통과 그릇 말라 가는 과일이 숲을 이루고

난반사되는 지저귐 아래서

 

포크로 노른자를 찌르면

새는 깨진다

 

은유가 끝가지 다정했던 적이 있었는가

잠시 망설이면 타인이 된다

 

부리처럼 식은 밥을 쪼아 먹다

고독과 무리 사이

불안한 거리에서

은유는 시작된 건 아닌지 골몰한다

 

노트 속에 남은 새들의 발자국

무리는 세상에서 가장 큰 고독

 

 


 

 

허유미 시인 / 겨울은 먼저 그곳으로 갔다

 

 

밤이 아는 얼굴로 다가와

등을 쓸어 주었다

안부를 물었을 때 눈은 서성이다 살포시

발을 만지고 껌뻑거렸다

더 이상 어두울 곳 없어 달아날 곳도 없다

돌아갈 방향으로 보채듯 눈은 내리고

바다부터 오던 길이 바다로 끝나면

질문과 대답은 들숨과 날숨 중 하나

흐린 구름 움켜진 몸살로 도착했다

벗어놓은 신발들 위로 쓰다듬듯 벗어놓은 신발들

몸에 꼭 끼워보는 겨울밤

눈 소리 또박또박 적으면 배가 따뜻해지는

창문에 밥물 같은 입김이 가득하다

같이 웅크린 채 잠자고 나면

까만 눈동자 속에 동박새가 폴짝폴짝

 

 


 

 

허유미 시인 / 파도​

 

철썩

뺨에 파도가 쳤다 생각하기로 했다

다시 한번 뺨을 향해 달려오던 파도는

옆으로 꼬꾸라졌다

고름이 부풀어 터질 듯한 바다

게들처럼 줄지어 선 배들은

며칠째 포구에 묶여 정박 중이고

기름때 덕지덕지 묻은 아버지 등 너머

바람에 요란스럽게 부딪치는 술병들도

며칠째 마루에 정박 중이다

바다도 아빠도 나도

모두 아픈 밤이었다

 

 


 

 

허유미 시인 / 수상한 K 아저씨​

제주에 한 계절 살러 왔다며

밖거리* 세를 든 사진사 K 아저씨 수상하다

엄마가 새벽에 일어나 물옷 챙겨

바다 갈 때 오후에 텃밭 가꿀 때

뒤꽁무니 따라다니는 것 내가 안다

엄마보다 한 살 아래라 들었는데

한라산, 폭포, 민속촌 구경 갈 곳도 많은데

하루도 빠짐없이 엄마 쫓아다니며

사진 찍는다 수상한 K 아저씨

전복 하나 얻어먹으려는 속셈인지

돈을 꾸려는 꿍꿍이인지

동네잔치 날 몸국** 끓이는 엄마 옆에 붙어서

꽁알꽁알 대화 나누며 사진 찍는다

동네에 원룸도 있고 싼 펜션도 있는데 어째서

여자 둘만 사는 우리 집에 세를 들었을까

수상한 K 아저씨

몰래몰래 숨어서 감시하느라

지각도 하고 숙제도 못 했는데

한 달 지나니 방값 넉넉히 주고 사라졌다

몇 달 뒤 책을 보내왔는데

'해녀의 한 계절'

책장을 넘기니 엄마 사진이 가득하다

엄마는 책 잘 받았다며 다음 계절에 오면

옥돔죽 또 쒀 주겠다고 K 아저씨와 통화를 한다

옥돔죽은 언제 쒀줬지

수상한 엄마

​​

*'바깥채'의 제주 방언.

**돼지고기 육수에 모자반을 넣고 끓인 국.

 

 


 

허유미 시인

1979년 제주 출생. 2016년 제주작가 신인상, 2019년 《서정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2023년 박영근 작품상. 청소년 시집 『우리 어멍은 해녀』, 앤솔로지 『시골시인-J』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