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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재환 시인 / 물속 이그니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8.
김재환 시인 / 물속 이그니스*

김재환 시인 / 물속 이그니스*

 

 

호숫가에 있었어요 그날

 

뭔가에 쫓기듯

붉은빛 가득 짊어진 산이 다급히 뛰어들었죠

도무지 꺼지지 않던, 물속 불

순식간에 붉은 비명으로 범람했어요 호수는

 

불길해진 나의 주말이 흐렸다 갰다 하는 사이에도

도심 안쪽 야근의 피로를 벗던 방화복이 긴급 출동하는 사이에도

번졌어요 계속, 북동쪽으로

저게 실화인가요? 사이렌 소리와 헬기의 다급함이 귓속에서 녹아내렸죠

뭉크의 절규로 뒤엉킨 수많은 새 둥지 곤충 나무 네 발 가진 눈빛들

살려달라는

 

간신히 혐의를 벗을 수 있었죠 그때 체포된

담배꽁초로부터

별안간을 뒤집어쓴 바람은 연신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어요

결혼을 한 주 앞두고 있었다고 해요 새까맣게 그을린

텐트 안에서는

신입 방열복이 간신히 손가락을 움직여 온수가 되어 가는 물병을 더듬었어요

화염화상인가요 산산조각 난 저들의 숨소리

심하게 타버린, 불에 갇혀 아주 순식간이었죠

 

호수에 비치는

이쯤에서 건너편 산을 향해 야호-, 하면

신화처럼 걸어 나오던 전나무와 풀꽃들

너와집과 굴피집을 닮은 그 무수한, 웃음소리들은 어디에서 만날까요 이제

 

제발 그만,

 

젖은 감정으로 들여다보았어요

온몸을 붕대로 감은 채 물속 깊이 누워 신음하는 산을

 

한동안

 

*이그니스(Ignis) : 라틴어로 불을 의미.

 

 


 

 

김재환 시인 / 꽃비

 

 

 암흑 속에서 천천히 내 몸을 더듬었어요

 만져져요 미라처럼 감싼 붕대와 진물

 뼛속에서부터 섬뜩한 무늬로 몸 밖을 향해 직선으로 뻗어나간 비명, 머리 위에서 구름버섯처럼 친절히 피어나요

 

 저기요 잠깐만요 이곳 푸른 지구 맞죠?다른 세상에 불시착한 것만 같아요 대체 무엇이 휩쓸고 간 걸까요 새까맣게 탄 들판, 반건조 오징어구이처럼 오그라든 오월의, 깨진 오리 나뒹구는 유리 액자 속 파편처럼 얼비치는 기형의 꽃말들

 

 저 담벼락 밑 좀 봐요 반쯤 바람 빠진 축구공인가요

 어떤 괴물이 한번 물어뜯고 던진 듯한 이빨 자국

 혹시 누구, 저 검고 둥근 게 뭔지 아세요?

 

 ―그건 어느 집 아이의 불탄 곱슬머리지, 아니 반쪽만 남은 뒤통수. 그것은 어쩌면 아무리 입을 크게 벌려도 다 담기지 않는 커다란 경악

 

 라듐, 우라늄, 토륨

 원자핵이 붕괴하면서 나온 일본산 아기유령 캐스퍼

 흰 레이스 커튼처럼 부드럽고 고요히 투하된 리틀보이

 어린 해골쯤 단번에 원 킬 하는, 어차피 죽음의 도시 이곳은

 붕대유령과 아지랑이쯤 길에 널렸죠

 

 대참사라고 기록하다

 그ㆍ기ㆍ록ㆍ을ㆍ다ㆍ기ㆍ록ㆍ하ㆍ지ㆍ못ㆍ한ㆍ채ㆍ동ㆍ공ㆍ이ㆍ녹ㆍ아ㆍ내ㆍ리ㆍ기ㆍ도ㆍ전ㆍ그ㆍ대ㆍ로ㆍ숯ㆍ덩ㆍ이ㆍ가ㆍ된

 ―뻑큐를 방출하듯, 불에 그을린-그래 개고기처럼 검게 입 벌린 채 오그라든, 너의 양 손가락

 

 흔적도 없이 사라진 유리창, 저승 입구를 닮은 건물 아가리들

 방사능은 너의 짧은 상상만으로도

 너의 코와 눈썹과 혀와 동공과 내장과 고환이 동시에

 아주 빠르게 미사일 배송보다 신속하게

 입체 서라운드로 실감 나게 죽여주는 2 SV/h* 슬픔

 바람에 실려 이 골목 저 골목 다 태워도 보이지 않는,

 

 ―딸아이 등에 기어이 쌍둥이 언니를 통째로 붙여주셨군요 우린 레고 블록이 아니에요 1+1을 좋아해 값싼 후쿠시마 고등어만 골라 먹던 너의 어머니

 

 ―발가락 아홉 개 좀 돌려주세요 너를 낳고도 하반신은 자궁에서 꺼내주지 않는 어머니

 

 ―얘야 나는 너의 뇌와 눈알을 먹지 않았단다 그건 체르노빌 야적장 잿더미를 뒤적여보렴

 

 ―머리가 없어 벼랑으로 일제히 뛰어가는 개구리들, 살가죽이 벗겨진 채 병상에서 붉은 육포가 되어가는 너의 형, 그래 너의 오빠

 

 ―얼굴만 커다란 구름이 공중에서 피를 토해요

 

 ―저기, 잠깐만요 그런데 나는 몇 번째 실종자죠?

 (귓속 구더기들이 떠들어, 죽었는데도 잠을 잘 수 없어요 그러니 누가, 저쪽에서 뒹구는 제 턱 좀 주워서 입 좀 닫아주세요)

 

 ―그렇지만 어머니 그날 하늘에 불이 난 후부터 내 몸 곳곳에서 화농성 꽃이 피어요 붉은 진물이 밤새 빗물처럼 흘러요

 

 ―얘야 그것은 꽃비란다 오월이잖니, 활짝 웃어보렴 오늘 밤 너의 몸속 장기들도 꽃처럼 피어날 거야

 

 ―화상 입은 곳들이 밤새 풀향기 대신 신음을 토할 거야 비처럼 주룩주룩 흘러내릴 거야 그래서 영영 너는 비에 젖지 않을 거야, 우산이 필요 없으니 얼마나 다행이니 네 안에서 쏟아져 서서히 차오르는 꽃비-가득한

 

*시버트(SV/h) :방사능 관련 단위이며 시간당 피폭량.

 

 


 

 

김재환 시인 / 어느 날 혼자서 당신을 찾아갔을 때

 

 

 (어쩌다살아남은생명체들은빠르게진화해갔다예상할수없는곳에서발견되는변이종들)

 

 하마를 닮아 엉덩이가 커다란 금속이 허우적댄다

 웅덩이에 빠져

 

 (지구에서 멸종된 최후의 인류는 그것을, 오토바이크라 불렀다)

 

 간밤에는 서늘한 유성우가 내렸고 안개 속에서 미세플라스틱 알갱이들이 부드럽게 번식했다

 

 유독 사람들의 시선을 움켜쥐는 도심 으슥한 공터,

 공포영화처럼 오래된 쓰레기더미 속 서로 으르렁대는 육식성 줄기들

 엉키기 직전이다

 

 가시 돋친 환삼덩굴이 하이에나처럼 썩은 시신을 핥는다

 풀숲 반쯤 보이는 우산 손잡이는 무참히 물어뜯긴 가젤 뒷다리, 찌그러진 생수병이 시쳇더미 속에서 죽은 몽구스처럼 말라간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낡은 코팅장갑은 47분 전 사자가 뜯어버린 피 묻은 영양의 뿔

 

 (바람에서 피비린내가 묻어난다 그렇다면…… 이곳 풀숲 어딘가에 잠복한 놈이 지금 나를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공터 담장 밑에 살던 늙은 그늘도 방금 습격당했는지

 검은 급소를 뜯긴 채, 마지막 숨을 파르르 떨었다

 

 엇, 뭐지?

 내 앞을 가로막는 검은 실오라기

 맨드라미 씨앗보다 작은 불개미 떼가 줄지어 컨베이어벨트처럼 움직인다

 맞다 이 갈기

 아까 영양의 깊은 폐부를 찢어 던졌던, 그놈이다

 육중한 사자의 오른뺨을 잘게 뜯어 굴속에 저장 중인 불개미들의 치밀한 생산라인

 맹수의 살점을 쉬지 않고 운반하는 개미의 허벅지 근육들이

 보디빌더처럼 툭-툭-불거진다

 

 건기가 우글거리는 도심 외곽,

 짙은 먹구름이 주린 배를 채우려 상공을 내달렸다

 

 그때, 근처 웅덩이 속에서 필사의 움직임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탈출하기엔 너무 큰, 물의 아가리……쯧쯧쯧

 무리에서 이탈한 새끼 구름이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여러 번 탈출을 시도하다가 결국 팔다리를 잃고 천천히 가라앉았다

 

 거칠게 공터에 휘몰아치는 비바람

 풀밭 한쪽 무성한 강아지풀들이 4/4박자 빠른 비트에 관절을 흔들며 테크노를 추기 시작했다

 무더위를 침범한 소나기가 사냥을 시작하려는 걸까

 사바나가 일제히 긴장했다

 

 누군가 먹다 버린 한약 비닐 파우치 속에서

 문득 걸어 나오는 웅성거림, 불을 발견한 신종 원시인들이

 나뭇가지를 꿴 사슴을 어깨에 메고 신나게 마을로 돌아가고 있었다

 

 공터를 벗어나 횡단보도 앞에 섰는데

 산업폐기물을 가득 실은 덤프트럭이 순간 초록 보행신호를 마비시키며 지나갔다

 

 놀라 뒷걸음치다 발에 밟힌 종이 하나,

 구겨진 활자 속에서 참숯처럼 검게 탄 헤드라인이

 작살처럼 날아와 내게 꽂혔다

 

 물에 잠기는 섬나라 투발루, 지구 온난화 해결책은?

 

 건너편 사무실

 업무를 마친 태양 씨가 서머타임제를 지키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 전등 하나 단속하듯, 한 시간 일찍 지구를 끄고

 암전 쪽으로 퇴근을 서둘렀다

 

 어느 날 혼자서 당신을 찾아갔을 때

 

 


 

 

김재환 시인 / 라스트 나잇 세레나데

ㅡ 권장사항: Tol & Tol의 연주곡 'Last Night Serenade'를 들으며 감상할 것

아무도 없는 창가에서 둥근 공처럼 등을 말고 있었어

붉은 구름 속으로 해가 사라지는 먼 곳은 기억나지 않아

 

투명을 연주하는 무성한 빛줄기를 떠올리면 어떨까

생각해 저만치 달빛에 얼비치는

노래를 데려다 곁에 앉혔을 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거,

별들이 왈칵 쏟아진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윽한 소용돌이라고 해야 하나

 

말없이 티슈를 빼내듯 고요를 한 장씩 뽑는 시간이 길어졌어

 

창밖엔 갓 핀 봄꽃들이 사방에 엎질러져 있고

무수히 산란하는 희고 가는 손가락들

스치듯 미끄러지는 건반 위의 율동처럼

그렇게, 날아오르는 나비 떼가 보여

 

폈다 오므렸다

 

일렁이므로, 홀린 듯 고이는 귀를 내어주고

반짝임이 울창한 공중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어

한 잎 또 한 잎 겹겹이 오선줄 밖 어딘가로

 

찬란하게

아찔하게

 

솟구치는 저기, 저 게

어떤 생으로 숨어드는 몸짓이라 믿으며

지금 이대로

끝없이 쏟아지는 가락에 이끌려 끝내 길을 잃어도 좋겠어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

-계간 『상징학연구소」 2024년 가을호 발표

 


 

 

김재환 시인 / 아상블라주*

ㅡ죽은 맛 죽을 맛

 

 

 아침에 일어나

 빽빽거리는 알람을 가장 먼저 죽이는 너

 뱃속에서 신호가 왔다

 변기에 앉아 어제를 잠시 떠올린다

 

쌀 시금치 아보카도 감자 풋고추 오이 대파 김 당근 우유 배추 방울토마토 열무 돌나물 커피 빵 돼지고기 상추 마늘 물 참치…… 누에고치 양털 뱀 거위 물소 악어 송아지……

 하루 동안 네가 먹고 입으며 살해한 이름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그러나 사는 동안 저들 중 누구도

(대체 언제까지 나를 이렇게 죽일 참이냐고)

 너도 한번 죽어보라고 물어뜯지 않는 그들

 길을 걷다 거울을 보면 너 대신 걷고 있는 그들

 너의 몸에서

 네가 죽이고 삼킨 수많은 색깔이

 에일리언처럼 왈칵왈칵 쏟아질 것만 같은 밤

 

 아픈 무릎에서, 반쯤 삐져나온 상추를 뜯어낸다

 귀를 후비다 풋고추 반 토막을 달팽이관에서 꺼낸다

 내일은 너의 왼팔에서 덜 씹힌 마늘 반쪽 불쑥 만져지겠다

 

 퇴근길 전철, 너의 구두 속에도

 밑창 대신 소화 덜된 배춧잎이 두 장 고여 있다

 

 그러니까 너는

 거리에 전시 중인, 최신형

 이동식 공동묘지야

 

 내 말 맞지?

 

* 아상블라주(Assemblage) - ‘모으기' '집합' '조립'을 뜻하는 미술용어로 평면회화에 삼차원성을 부여하는 기법.

 

-웹진 『시인광장』 2024년 7월호 발표

 

 


 

김재환 시인

1960년 전북 고창 출생. 전, 성남시청 안양시청 근무. 2022년 《시산맥》으로등단, 시집 『각시붓꽃』 출간. 제1회 시산맥기후환경문학상 신인상, 제33회 성호문학상 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