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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식 시인 / 상처를 만지다
태초에 상처가 있었다. 빛이 드러나지 않아 어둠에 잠긴 궁창은 한 치 앞이 안 보였고 만지지 않은 궁창 아래의 땅은 진창으로 황무하여 길이 없었다.
그 황무한 진창에서 너는 칼을 들어 상처를 도려내고 오래도록 색을 입혀 빛을 드러내었다. 상처를 누르고 빛을 품은 색은 마침내 상처를 안고 색을 품은 빛이 되었다.
서서히 밝아오는 궁창 마르며 길을 내는 땅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너는 어떤 신음을 들었다. 빛이 드러난 뒤에도 고스란히 남은 색으로 남은 색으로 덧입혀지지도 빛으로 다 스며들지도 않는 상처의 신음이었다.
숨기고 덧입혔어도 상처는 오롯이 살아 자라기를 멈추지 않았구나. 쌓고 이루며 만지는 색과 빛은 모두 상처일 뿐이었구나.
그날부터였던가. 네가 색을 품은 빛 속에 숨겨진 상처를 찾아 다시 만지기 시작한 것이.
빛이 드러나기 전 태초에 상처가 있었다. 너는 이 밤도 상처를 만지고 있다.
-시집 <상처를 만지다>에서
남태식 시인 / 번개
순간의 무수한 해탈이 다 마른 번개였던가.
비 듣기도 전, 추앙자들은 재빨리 번개의 얼굴을 가렸다.
놀라워라, 번개는 제 얼굴을 얼른 지웠다.
보라, 굳히기에 들어간 저 폭력!
웹진 『시인광장』 2024년 7월호 발표
남태식 시인 / 혼잣말
노인이 흘리는 혼잣말은 텔레비전이 혼자 듣는다
노인이 흘리는 혼잣말은 냉장고가 혼자 듣는다
노인이 흘리는 혼잣말은 벽이 혼자 듣는다
노인이 흘리는 혼잣말은 노인이 혼자 듣는다
노인이 흘리는 혼잣말은 안에, 안에만 듣는다
남태식 시인 / 그 서녘바다 동녘바다로
그 서녘바다 동녘바다로 오네 음습한 어둠의 참 가슴에 감추고 도둑고양이마냥 게걸스레 침 흘리며 돈다발 다발 바람에 뿌리며 바람 뒤에 숨어 안개 속에 숨어 눈알 빛내며 슬금슬금 오네 길 없는 산에 길을 내며 무인단속기를 피해 갓길로 길바닥에 배 바짝 붙이고 슬몄슬몃 기어서 오네 펄럭이는 붉은 검은 깃발들 펄떡이는 푸른 하얀가슴들 음침한 눈웃음으로 실실 온갖 탁상공론과 개똥철학으로 설을 풀며 오네 이간질하며 오네 절뚝이며 오네 스미네 슬금 지나치네 적시네 드디어 그 서녘바다 동녘바다를 덮치네 그날부터 해는 동시에 뜨고지네 동시에 뜨고지고 동시에 뜨고지고 동시에 뜨지를 않네
동시에 지지를 않네 마침내 그 바다에 가뭇없이 해 사라지네 해 사라져 허공 중에 빛도 소리도 없는 한밤만 차며 흐르네 잠이 꿈이 사라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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