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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길 시인 / 흰 초롱꽃
서럽고 애달픈 혼 눈 못 감고 피어난 꽃 살 없이 뼈도 없이 꽃씨되어 흩날리다 텅 빈 몸 혼을 덮던 구멍난 철모위에 피었네 숨소리 잠재우며 피어난 흰 초롱꽃 문밖에 있는 그대 꿈 꽃으로 살아나서 어머님 기다리다가 꽃초롱 불 밝히고 섰구나
현종길 시인 / 샛별
지붕에 기대 놓은 사다리 사이로 샛별이 걸어 내려와 마당 한켠 우물물을 마신다
나는 물에 빠진 풍경을 떠서 차를 달인다 차 한 잔을 마시니 별빛이 입술에 걸리고
그이와 나는 하얗고 깊게 젖어 하나가 되는 금성
현종길 시인 / 다이달로스의 날개 -노숙자
지구의 숨구멍 같은 지하철 통로 한쪽 벽 흰 장대 같은 의족을 한 남자가 종잇장 같은 손을 내민다 밥한끼 값을 그에게 주었다 양같이 선한 눈빛의 그가 머리를 숙일 때 한파에 지하도 불빛처럼 반사되는 하얀 의족이 아프게 읽힌다 바코드같이 까만 틈과 틈사이에서 칩처럼 끼어 부러진 날개로 동굴 속에 갇힌 이카로스 시간의 틈마다 손톱이 닳도록 코드를 맞춰보지만 그 꿈은 오늘도 전철이 삼키고 간다 방울뱀의 경고 같은 호각소리가 뒷목을 누르는 밤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드는 냉기 속으로 먼지같이 툭툭 차인 몸 그믐밤처럼 어둡다 외발로선 이카로스의 오늘과 내일 사이가 길다 신화처럼 다이달로스의 날개를 달고 그가 별 밭으로 날아가기를 빌며 나는막차를 탔다
-시집 「카르페 디엠」(도서출판 문장21, 2019)
현종길 시인 / 어머니
마르고 작아진 가슴에서 동짓달 풍지 우는 소리가 납니다 어머니 그늘진 삶의 빈 무대에서도 울지 못하신 어머니 어머니 마른 숨결이 내 등을 얼립니다
오늘은 못난 내 가슴을 내어 드리니 마법에 걸린 것처럼 큰 소리 내어 한 번 우십시오
어머니
현종길 시인 / 아기
별처럼 맑고 푸른 눈이 반짝인다 울음으로 말을 하는 아기 아기 눈 아래 대롱대롱 눈물방울 그 눈물방울 속 아롱아롱 반짝이는 별 별빛 안에 엄마를 담고 웃는다
아기 얼굴에 뽀뽀하면 좋은 맛 꽃향기 가득해 아이스크림처럼
잠든 아기가 꿈을 꾸는지 한 쪽 눈에서만 은하가 흐른다 남은 가슴 하나엔 새 별이 뜨나 보다
현종길 시인 / 항아리
햇덩이 같은 백자 항아리가 귀 네 개를 열고 세상을 듣는다 하늘에 큰 생명을 담아 내린 듯 붉은 매화가 피고 난초꽃이 하얗게 피고 은하수 흐르는 하늘에 꽃구름이 피어난다 툭툭 끊기다 떨어지는 메아리를 담아 별 무리 같은 달 꽃이 환하다 마음에서 욕심을 썰물처럼 밀어내며 네 개의 귀는 날개를 펴고 날아갈 듯 잡아둘 수 없는 신을 본 듯 그분인가요, 당신은
현종길 시인 / 죽녹원 카르페 디엠
햇살이 겨눈 댓잎 파리들 파도치는 소리 온음이 속 텅텅 비우고 반음을 채운다 초록 정맥으로 흘러 다니는 생의 음표들 한 곡조 시간의 흐름을 멈추는 화음 부르지 않아도 메아리로 와 안긴다
둥근 마디마다 청운을 한 둘레 두르고 하늘을 품을 줄도 내어 줄 줄도 아는 곧은 몸 공명처럼 빠져나가는 우주의 음계들 그 음계를 넘어서는 무언 합주의 대 숲길 저 홀로 맑은소리 퉁소를 불고 있다
하늘의 동굴 같은 대나무 숲속에서 선계의 악기를 다 연주하듯 음악회를 한다 나는 죽녹원 삽화처럼 댓잎 파리 위에 앉아 우는 새 한 마리 카르페 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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