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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현종길 시인 / 흰 초롱꽃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7.
현종길 시인 / 흰 초롱꽃

현종길 시인 / 흰 초롱꽃

 

 

서럽고 애달픈 혼

눈 못 감고 피어난 꽃

살 없이 뼈도 없이

꽃씨되어 흩날리다

텅 빈 몸

혼을 덮던

구멍난 철모위에 피었네

숨소리 잠재우며

피어난 흰 초롱꽃

문밖에 있는 그대

꿈 꽃으로 살아나서

어머님

기다리다가

꽃초롱 불 밝히고 섰구나

 

 


 

 

현종길 시인 / 샛별

 

 

지붕에 기대 놓은 사다리 사이로

샛별이 걸어 내려와

마당 한켠 우물물을 마신다

 

나는

물에 빠진 풍경을 떠서 차를 달인다

차 한 잔을 마시니 별빛이 입술에 걸리고

 

그이와 나는

하얗고 깊게 젖어 하나가 되는 금성

 

 


 

 

현종길 시인 / 다이달로스의 날개

-노숙자

 

 

지구의 숨구멍 같은 지하철 통로 한쪽 벽

흰 장대 같은 의족을 한 남자가

종잇장 같은 손을 내민다

밥한끼 값을 그에게 주었다

양같이 선한 눈빛의 그가 머리를 숙일 때

한파에 지하도 불빛처럼 반사되는 하얀 의족이

아프게 읽힌다

바코드같이 까만 틈과 틈사이에서 칩처럼 끼어

부러진 날개로 동굴 속에 갇힌 이카로스

시간의 틈마다 손톱이 닳도록 코드를 맞춰보지만

그 꿈은 오늘도 전철이 삼키고 간다

방울뱀의 경고 같은 호각소리가 뒷목을 누르는 밤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드는 냉기 속으로

먼지같이 툭툭 차인 몸 그믐밤처럼 어둡다

외발로선 이카로스의 오늘과 내일 사이가 길다

신화처럼 다이달로스의 날개를 달고

그가 별 밭으로 날아가기를 빌며

나는막차를 탔다

 

-시집 「카르페 디엠」(도서출판 문장21, 2019)

 

 


 

 

현종길 시인 / 어머니

 

 

마르고 작아진 가슴에서

동짓달 풍지 우는 소리가 납니다

어머니

그늘진 삶의 빈 무대에서도

울지 못하신 어머니

어머니 마른 숨결이 내 등을 얼립니다

 

오늘은 못난 내 가슴을 내어 드리니

마법에 걸린 것처럼

큰 소리 내어 한 번 우십시오

 

어머니

 

 


 

 

현종길 시인 / 아기

 

 

별처럼 맑고 푸른 눈이 반짝인다

울음으로 말을 하는 아기

아기 눈 아래 대롱대롱 눈물방울

그 눈물방울 속

아롱아롱 반짝이는 별

별빛 안에 엄마를 담고 웃는다

 

아기 얼굴에 뽀뽀하면

좋은 맛

꽃향기 가득해

아이스크림처럼

 

잠든 아기가 꿈을 꾸는지

한 쪽 눈에서만 은하가 흐른다

남은 가슴 하나엔 새 별이 뜨나 보다

 

 


 

 

현종길 시인 / 항아리

 

 

햇덩이 같은 백자 항아리가

귀 네 개를 열고 세상을 듣는다

하늘에 큰 생명을 담아 내린 듯

붉은 매화가 피고

난초꽃이 하얗게 피고

은하수 흐르는 하늘에

꽃구름이 피어난다

툭툭 끊기다 떨어지는 메아리를 담아

별 무리 같은 달 꽃이 환하다

마음에서 욕심을 썰물처럼 밀어내며

네 개의 귀는 날개를 펴고 날아갈 듯

잡아둘 수 없는 신을 본 듯

그분인가요, 당신은

 

 


 

 

현종길 시인 / 죽녹원 카르페 디엠

 

 

햇살이 겨눈 댓잎 파리들 파도치는 소리

온음이 속 텅텅 비우고 반음을 채운다

초록 정맥으로 흘러 다니는 생의 음표들

한 곡조 시간의 흐름을 멈추는 화음

부르지 않아도 메아리로 와 안긴다

 

둥근 마디마다 청운을 한 둘레 두르고

하늘을 품을 줄도 내어 줄 줄도 아는 곧은 몸

공명처럼 빠져나가는 우주의 음계들

그 음계를 넘어서는 무언 합주의 대 숲길

저 홀로 맑은소리 퉁소를 불고 있다

 

하늘의 동굴 같은 대나무 숲속에서

선계의 악기를 다 연주하듯 음악회를 한다

나는 죽녹원 삽화처럼

댓잎 파리 위에 앉아 우는 새 한 마리

카르페 디엠,

 

 


 

현종길 시인

1954년 경기도 가평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3년 《문장 21》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한 알의 포도가 풀무를 돌린다』 『카르페 디엠』. 신사임당 전국백일장 (장원). 제17회 김유정 기억하기 공모전 (우수상). 2018 춘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