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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문 시인 / 못이 자라는 숲
낫과 부삽을 들고 정원에서 시를 썼지 백일홍과 덩굴장미가 뒤엉키고 라일락 향을 품은 사과가 쏟아졌다 웃자란 꽃 덤불에 누웠지만 향기에는 라임이 없어서 벌 나비는 깜빡이는 커서를 선회하고 구겨버린 종이 같은 하늘이 손끝에 휘감겨 왔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방울 속으로 난 푸른 길을 따라 떠나는 사람을 쫓아서 길을 나섰다
그다음 거리의 시를 썼어 애초에 다듬어 놓은 정원이 오래갈 거라 믿지는 않았다 비가 그친 틈에 화분을 파헤쳐 보면 망가진 장난감과 깨진 술병투성이였다 비를 피할 곳을 찾아 헤매다 눈을 뜨면 어김없이 꿈속이었다 거리의 끝에는 광장이 펼쳐졌고 거기서는 저마다 자기 플롯을 이끌고 온 사람들 자기만의 방식으로 우리의 시라고 불러온 노래를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정원에서도 거리에서도 나는 늘 반쯤 죽은 채로 노래했다 한동안은 지하 세계에 스스로 유폐하고 시를 이어갔다 창을 열면 담벼락이 보이고 볕을 쪼이며 늘어선 프로판가스통 위를 날아다니는 고양이 언젠가는 꽃에 대한 믿음 하나로 이파리를 세어갔지만 남은 것은 잎자루 꽃대였다 다정하고 아름다운 길동무들은 뿔뿔이 자기 침대로 돌아간 지 오래였으므로 삶이 비대해지기 전에 뒤돌아보련다 다짐하지만 선택지가 불어날수록 선구안은 폐색되어갔다 고양이들은 거짓말처럼 아늑한 모퉁이를 찾아내는데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쪼이는 구석은 요람 아니면 무덤이었다 어느 사이 나는 묘석 사이로 난 포도를 걸으며 노래를 이어갔다 여름에 부르는 봄노래 가을에 부르는 여름 노래처럼 어느 계절에는 거짓말처럼 큰 눈이 퍼부어서 가지가 찢어지는 굉음 속에서 흙먼지와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표정으로 사랑을 노래했다 결국 노래하는 자는 순교자였다
작고 영롱한 기억마저 말소한 다음에야 사랑 노래는 시작되었으므로 내가 지하 서재에 엎드려 있을 때 어딘가 불이 켜져 있었다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바닥에 바닥으로 내려가 깨진 묘석을 껴안고 뒹굴고 있을 때조차 해는 지고 별은 비추었다 모든 것은 제 빛으로 다가왔지만 내 몫의 노래는 없었다 광장을 지나 길 끝에 이르면 낡은 문고리가 매달린 대문이었다 세상의 모든 문밖에서 나는 언젠가 당신이 돌아서는 발소리를 들었지만 해피엔드는 다른 정원에서 꽃핀다
-『현대시』 2024-2월(410)호
신동문 시인 / 겹벗꽃
바람으로 다듬은 유려한 곡선 줄기마다 탐스런 매혹을 매단 함성이여!
너에게는
홍매화의 고고함과 연수국의 풍성함과 백목련의 겸손함과
황진이의 도도함과 사임당의 온화함과 춘향이의 절개와 홍랑의 애틋함이
연분홍 기품 되어 춘풍 허공에 고운 자태로 송이송이 매달렸구나
매혹의 꽃입술로 읊어내는 시조는 송이마다 조탁된 운율을 매달고 실바람 가지 끝에 사랑가를 부르노니
매화를 사모한 벚꽃이여 벚꽃을 사모한 매화여!
신동문 시인 / 핏발울이 고여있던 한 켤레의 신발처럼 -통분과 넋두리일 뿐인 이 한 편의 시를 4.19의 고혼 앞에 -
핏방울이 고인채로 잊혀져 있던 한 켤레의 헌 신발처럼 역사는 이렇게 무참한가.
빗발치듯 난사하는 총구앞에 맨주먹의 대열은 땅에 엎드리고 마침내는 이를 갈며 골목으로, 집 뒤로 쓰러진 시민을 들쳐 업고 물러선 경무대 어구 길 한복판에 주인을 잃고 선열한 핏방울만 고인채로 잊혀져있던 한 컬레 신발의 처절하던 고독이여 몸서리나던 부재여 끝끝내 너는 무상하구나.
그날 총알과 돌조각이 교차하던 하늘엔 실의의 기, 구름만이 방향 없이 파닥이고 목청이 터지라고 부르던 구호는 맥없는 메아리로 허공을 표류하고 활개치며 내흔들던 사지도 탈진한 목표 속을 의미없이 내저으며 무위의 거리를 우왕좌왕
오늘도 어제같이 방황하는 인간의 무리들은 그냥 무리일 뿐 개성도 조직도 목적도 없는 오늘을 우리는 혼자서만 서 있다.
그날 뭉쳤던 묵계의 대열, 스스로의 명령으로 내닫던 전진, 밀물 같은 사랑으로 맞잡던 팔장, 당도 정강도! 「프라카드」도 더구나 그 어느 의무도 아닌 목숨의 권리로 심장의 본능으로 인간의 자각으로 천년만의 현실을 조형하던 만년만의 생명을 향수하던 그날의 천재여! 우리들의 혁명이여! 깨어나라 되살아라 되살아라 라고 내일 아닌 내년 아닌
바로 오늘에 오늘에라도 이렇게 부르며 발버둥 쳐도 핏방울만 흥건히 고여 있던 그날의 신발만이 아직도 주인 없이 불행한 시인의 가슴속에 모다귀 박히듯 남아 있을뿐 흩어진 대열과 가버린 얼굴들은 세계의 그 어느 적지로 이 사월에 홀로 떠돌고 있는가
보증 못할 맹서로써 내 오늘 어찌 입치레의 추도로써 내 오늘 어찌 기념식의 행사로써 내 오늘 어찌 그날을 회상하며 즐겁겠는가 아아 그날 고절됐던 한 켤레 신발, 핏방울 흥건히 고였던 신발처럼 나는 외롭게 혼자 돼서 오늘을 진종일 통곡할 뿐 소리도 다 못내고 통곡할 뿐.
핏방울 고인채로 잊혀졌던 한 켤레 헌 신발처럼 인간은 이렇게 고독한가.
신동문 시인 / 봄강물
봄 녹은 강물은 태동처럼 조용히 꾸물거렸다.
한밤내 울며 수없이 떨어져 가는 별을 보면서도 흐르는 듯 선채로 강물은 나무처럼 사라나는 천겁의 목숨
기러기 떼 먼데로 철 따라 보내며 비에 젖어 수면은 거울족인양 부서져도 밑물은 매양 의젓한 어른 같은 마음이었다.
진종일의 기도도 노을 안개 속에 잠재우고 내일 앞에 다시 어제처럼 서서 기다리는 그는 울지 않고 가는 사람이었다.
신동문 시인 / 비인 가슴
가고 난 네 자리에
어리는 아지랑이 무지갠 양 안갠 양 어려 오는 네 모습
비인 자리에 서서 젓는 내 팔 안에 안기는 것은 한숨인가 꿈인가 피 없는 가슴인가
기다리다 가고 말 비인 자리에 누가 와 서는가 너도 없는데
신동문 시인 / 풍선기-1호
초원처럼 넓은 비행장에 선 채 나는 아침부터 기진맥진한다. 하루 종일 수 없이 비행기를 날리고 몇 차례인가 풍선을 하늘로 띄웠으나 인간이라는 나는 끝내 외로웠고 지탱할 수 없이 푸르른 하늘 밑에서 당황했다. 그래도 나는 까닭을 알 수 없는, 내일을 위하여 신열을 위생하며 끝내 기다리던, 그러나 귀처란 애초부터 알 수 없던 풍선들 대신에 머어ㄴ 산령(山嶺) 위로 떠 가는 솜덩이 같은 구름쪽 만을 지킨다.
신동문 시인 / 차창
먼 산에 구름 가고 나도 가고
차창에 바람 가고 나도 가고
복사꽃 진달래 아지랑이
졸듯이 서 있는 초가지붕
그렇게 피어나는 내 가슴의 꿈
먼 산에 구름 가고 나도 가고
신동문 시인 / 아! 신화(神話)같이 다비데군(群)들 -4-19의 한낮에
서울도 해 솟는 곳 동쪽에서부터 이어서 서 남 북 거리 거리 길마다 손아귀에 돌 벽돌알 부릅쥔 채 떼지어 나온 젊은 대열 아! 신화(神話)같이 나타난 다비데군(群)들
혼자서만 야망(野望) 태우는 목동(牧童)이 아니었다. 열씩 백씩 천씩 만씩 어깨 맞잡고 팔짱 맞끼고 공동의 희망을 태양처럼 불태우는 아! 새로운 신화 같은 젊은 다비데군들
고리아테 아닌 거인(巨人) 살인 전제(殺人專制) 바리케이트 그 간악한 조직의 교두보 무차별 총구 앞에 빈 몸에 맨주먹 돌알로서 대결하는 아! 신화같이 기이한 다비데군들
빗살 치는 총알 총알 총알 총알 총알 앞에 돌 돌 돌 돌 돌 주먹 맨주먹 주먹으로 피비린 정오의 포도(鋪道)에 포복(匍匐)하며 아! 신화같이 육박하는 다비데군들
제마다의 가슴 젊은 염통을 전체의 방패삼아 과녁(貫革)으로 내밀며 쓰러지고 쌓이면서 한 발씩 다가가는 아! 신화같이 용맹한 다비데군들
충천하는 아우성 혀를 깨문 안간힘의 요동치는 근육 뒤틀리는 사지 약동하는 육체 조형(造型)의 극치를 이루며 아! 신화같이 싸우는 다비데군들
마지막 발악하는 총구의 몸부림 광무(狂舞)하는 칼날에도 일사불란 해일처럼 해일처럼 밀고 가는 스크램 승리의 기(旗)를 꽂을 악(惡)의 심장 위소(危所)를 향하여 아! 신화같이 전진하는 다비데군들
내흔드는 깃발은 쓰러진 전우의 피묻은 옷자락 허영도 멋도 아닌 목숨의 대가(代價)를 절규로 내흔들며 아! 신화같이 승리할 다비데군들
멍든 가슴을 풀라 피맺힌 마음을 풀라 막혔던 숨통을 풀라 포박된 정신을 풀라고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고 이기라 이기라 이기라고
아! 다비데여 다비데들이여 승리하는 다비데여 싸우는 다비데여 쓰러진 다비데여 누가 우는가 너희들을 너희들을 누가 우는가 눈물 아닌 핏방울로 누가 우는가 역사(歷史)가 우는가 세계(世界)가 우는가 신(神)이 우는가 우리도 아! 신화같이 우리도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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