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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빈 시인 / 꿈의 비단길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게 허락된 시간이 겨우 몇 뼘 남지 않은 저물녘에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길은 내 마음을 거처가고 있다는 것을 그 길에 피고 지는 것이 장미꽃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 길을 적시고 가는 것이 단비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 길을 훑고 가는 것이 봄바람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 길섶에 우는 것이 뻐꾸기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 길은 돌고 돌아 다시 원점에 가 닿는다는 것을
일생을 두고 한결같이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맸던 꿈의 비단길이 내가 나날이 허둥거리며 허투루 밟고 지나온 그 길임을 땅거미가 내릴 때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나마 어두워지기 전에
-시집 <꿈의 비단길> (지혜, 2019)
홍종빈 시인 / 바람의 무덤
유학산 기슭 다부원에 바람이 분다 철쭉꽃 지천으로 진다 바람이 진다 피비린내 나는 바람이 진다 무덕무덕 떨어지는 6월의 바람에는 통곡이 물든 채 뚝, 뚝, 철쭉꽃으로 지고 있다 두 동강이 나버린 산하를 휘돌아온 바람이 가지마다 송이송이 피묻은 울음으로 피었다 지는 것이다 저 자태도 향기도 다 바람이다 가슴 설레던 속삭임도 자진 북소리도 다 두고 제 혼자 꾸덕꾸덕 말라가는 바람, 한 시절 내내 제 생살을 물어뜯으며 피었던 바람이 끝내 울음으로 피는 핏빛 적멸, 그 끝에 내가 있다
-시집 『젓가락 끝에 피는 꽃』 (지혜, 2013)
홍종빈 시인 / 계단 아래서 주운 것
계단 아래서 어슬렁거리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덩어리 하나 주웠다 너무 따뜻하고 낯익어서 뒤집어 보고, 맛보고, 냄새를 맡아 보니 그것이 바로 내가 한평생을 그토록 찾아 헤맸던 행복 그것이었다 계단 위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던 그것, 지나친 바닥마다 무수히 널려 있던 그거, 마음만 열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던 그것, 너무 흔해서 무시하고 지나쳤던 그것, 잡는 순간 마음의 문이 활작 열리는 그것, 언제나 내 옆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그것, 바보처럼, 바보천치처럼 올가미 치켜들고 이승의 끝자락까지 찾아 헤맸던 그것을 마음의 계단 아래서 어슬렁거리다 주웠다 오오, 여기가 바로 온기 가득한 사람의 뜰
-시집 『가시』 (화니콤, 2011)
홍종빈 시인 / 박제된 시간
이미 박제된 시간이다 해묵은 사진첩을 들추자 뚜벅뚜벅 박제된 시간이 걸어 나온다 어느 햇살 좋은 봄날 반질거리는 툇마루에 앉아 십자수를 놓는 예쁜 누나가 삼단 같은 머리 땋아 내린 채 최신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꿈을 키우던 그곳,
담장따라 봉선화 채송화 맨드라미 피고 앵두나무 살구나무 돌배나무가 철 따라 열매를 익히면 바둑이가 컹컹 달님에게 고백하는 밤이 있고 마디마디 툭툭 불거진 어머니의 손가락을 빼닮은 대나무들이 스스럼없이 뒤란에서 서걱거리던 그곳,
얼마나 버거웠을까 그 지친 어깨 잠시라도 기대어 볼 작은 언덕 하나 없이도 오지게 익혀낸 오 남매는 당신을 송두리째 불살라 얻어낸 적멸의 사리, 그 사리들 품어 안고 연약한 허리가 활처럼 휘도록 치쳐가던 먼 어머니가 인자한 모습 그대로인 채 고스란하다
수렁 진 늪 길을 건너듯 질퍽거리는 한 시절을 건너면서도 서로 손 마주 잡고 버텨내던 한 가계의 진한 향기가 담장너머로 넘쳐나던 꿈의 둥지, 오로지 신앙처럼 기도처럼 그 둥지 하나에 매달려 시들어간 어머니와 누나가 박제된 시간 속에서 활짝 웃으며 걸어 나오고 있다
홍종빈 시인 / 지척이 천리인 내 고향
고향이라는 말은 언제나 가슴 짠한 그리움이다. 고향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 글썽이게 하는 그리운 얼굴들과 알알이 묻어나는 그 추억들 속에서 나는 언제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음 설레며 뛰놀곤 한다.
칠곡군 왜관읍 매원 3리, 그 이름도 상큼한 새마가 내 고향이다. 새마라는 이름은 새로운 마을이라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내 탯줄이 고스란히 묻혀 있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가슴에 묻은 채 떠나온 고향, 꿈결 같던 여린 시절을 거쳐 철이 다 들 때까지 오로지 어머니의 품속 따라 안온하게 안겨 살았던 그 고향이 나에겐 영원한 그리움이다.
봄이면 삐삐랑, 찔래순, 짠대랑, 진달래꽃 따먹고, 여름이면 봇도랑에서 미꾸라지, 붕어잡이에 더운 줄도 몰랐던 그 시절, 어쩌다 팔뚝만한 메기라도 한 마리 잡는 날에는 들뜬 가슴을 쓸어안고 산으로 들로 천방지축으로 휘젓고 다니느라 계절이 언제 바뀌었는지도 모르던 그때는 바람소리도 물소리도 새소리도 다 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이 꿈결만 같았던 그런 호시절이 분명 내게도 있었다.
가을이면 가을대로 겨울이면 겨울대로 놀이판이 넘쳐나던 그 걸쭉한 시절이 나에겐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추억이고 가슴 속에 꼭꼭 묻어둔 그리움이다.
내 고향 새마의 뒷동산에는 왜정시대 한때는 한없이 번창했다는 거대한 금광이 끝도 없이 깊었고 어쩌다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토끼몰이를 한답시고 그 캄캄한 굴속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던 기억이며, 정월 대보름날밤 달이 뜰 때를 맞춰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피워 올리던 그 달불놀이로 장다리, 오솔, 매원, 반송리, 안찔의 산꼭대기마다 일제히 치솟아 오르던 그 환호성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지금은 늙어서 죽고 없지만 천살은 족히 됐을 거라며 온 동네의 자랑거리였던 동제나무, 그 느티나무에 기어올라 호사를 타다 어른들에게 꾸지람만 듣고 쫓겨나던 기억이며, 달 밝은 여름밤이면 멍석 하나 깔아놓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메케한 모깃불 냄새 맡으며 어머니가 손수 밀어주신 누른국시를 배불리 먹던 그런 아련한 그리움이 지금도 내 가슴 한구석에서 짠하게 아려오고 있다.
홍종빈 시인 / 사마귀 -먹잇감
해거름의 낙동강 강둑길에 섬뜩한 암사마귀 한 마리 죽어 있다 앙칼지게 독기 세우던 그녀가 씹다 버린 껌처럼 주검으로 뒹굴고 있다 군침 흘리는 불개미들이 허기진 아귀처럼 달려드는 살벌한 삶의 현장이다 자손만대 이어갈 식욕으로 제 남편의 심장을 송두리째 먹어치우던 바로 그 암사마귀의 주검이다 머리부터 아작아작 씹어 삼키던 저 섬뜩한 자궁은 바스러지는 심장 소리 자욱한 집착의 동굴이다 물 올라 혈기 왕성하던 시절 바스러져가는 제 심장 소리 들어가며 그 미로의 동굴 속에서 헤매던 시절 내게도 있었다 보잘것없는 불개미에게 다시 아작아작 속수무책으로 뜯어 먹히고 있는 저 주검 앞에서 나는 문득 그 시절을 떠올리며 걸음을 멈춘다 오르가즘의 여운처럼 풀잎 가늘게 떠는 강둑길을 팔짱 낀 젊은이 한 쌍이 또 그 주검을 밟고 지나간다
홍종빈 시인 / 바람아 불어라
깃발은 미쳐야 제 맛이다 왜관온천 헬스장 창문에 비친 칠곡군청옥상에 꽂힌 태극기가 죽어 있다 물먹은 솜처럼 기가 빠졌다 황산벌에 엎어진 계백의 깃발인 듯 전의를 잃고 풀이 죽었다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도 흐린 법. 밀려오던 신바람이 죽어 따라 죽은 것이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신바람 빠진 상징은 죽은 것이다 미쳐 날뛰어야 할 그 상징의 아우성은 태초에 첫 깃발을 꽂으며 규정해 놓은 무소의 뿔 꿈꾸는 푯대 끝에 나래 활짝 펼 이상 높이 걸고 바람아 불어라 천년만년 불어라 깃발답게 미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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