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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우 시인 / 사이
바짝 다가서지 않기로 했다
한 뼘 손가락 사이로 꽃구름이 흐른다 꽃구름 하얀 그늘, 허공에 던지고 가늘게 꺼져가는 눈빛은 두 번째 가을 앞에서 깊어진다
오래 머물지 않기로 했다
모래바람 지나간 마른자리 사막을 건너던 은밀한 추파는 우리들을 위한 눈빛이었던 적 있던가 바람 대신 당신을 보낸
여기, 더
오래 머물지 않기로 했다
한정우 시인 / 말말말
잠잠해지다 아주 사라진다
공중에 누운 바람의 얇은 층으로 말들, 밀려온다 내려앉는다 멀게 가깝게 들리는 오후의 풍문들로 환절기 감기가 깊어진다 몇 년 전 들여온 케냐산 커피나무가 열매를 맺으려다 풍문에 흔들리며 불협화음이다
내가 모르는 공중의 말들, 주술처럼 쏟아지는 가벼움 입의 개수를 늘려 만들면 가벼운 공중이 되었다 함부로 늘어나오는 침방울이 꽉 차 햇빛의 수보다 많았다 말 많은 말에서 침방울이 튀어 열이 오르면 오미크론일지도 몰라 타이레놀 몇 알로는 어림없을지도 몰라
아까 삼킨 알약이 목젖에서 녹아 잠잠해지다 아주 사라진다 말을 잃은 휴일, 말 없는 말이 휴일을 채운 공중 낙인된 휴요일이다
한정우 시인 / 카페 同人 1985
한 풍경이 흘러갔다
담쟁이가 주인 없는 담을 넘는다 벌건 속살을 드러내던 능소화 올여름에는 피지 않았다
역병이 길어지는 동안 우리들 방학도 길어지고 일몰의 그림자도 짙어졌다
수업 후 동인에 모여 따뜻했던 시간들 턴테이블이 멈추고 긴 탁자에 놓였던 어묵탕 국물도 식은 지 오래, 제자들 그윽한 저녁 풍경을 온몸으로 품었던 노시인의 따스한 의자도 더는 볼 수 없어
사람들을 기다리던 대문은 세 번째 봄을 넘기지 못하고 아주 잠겼다 나무 빗장 밖에는 아직 돌리지 못한 발길들이 서성이는데
우리는 역병을 예기치 못하고 길어질 방학을 예기치 못하고 추억의 몰락을 예상치 못했다
무언의 더딘 세월이다
그 많은 풍경들 담쟁이 담 밑에 고이 묻혔다
-《문화도시 용인》 초대시, (2022년 상반기호)
한정우 시인 / 북천
한밤중 폭우에 문득 당신이 흘러가고 난폭했던 폭우도 흔적 없이 떠내려가고
먼 물소리 따라 무작정 떠나온 땅이 원통이었네 원통해서 주저앉아 북천에서 울었네 흰 물새 한 마리 북천을 꺾어 흘렀네 저 물길 흐르고 흐르다 설악의 깊은 골짝 어느 바위틈에 산산이 찢길까 물소리 따라 먼저 떠내려간 미유기 떼는 또, 어느 단애를 뛰어내리다 흩어질까
내 투명했던 눈동자 찌르고 눈앞에서 없어진 것들 내가 떠나보내고 떠나온 것들 세상의 비의와 세우지 못한 문장과 가물대는 어떤 약속들 떠난 것들은 다시 거슬러 오지 않아
가문 강바닥, 북천의 푸른 물소리 그만 그쳐버렸네
-시집 『우아한 일기장』 (달아실, 2023)
한정우 시인 / 나비는 뼈를 버렸네
제라늄 화분에 따라온 나비가 나비를 불러 집 안이 호접으로 가득 찼다
모나크나비뼈, 사향제비나비뼈, 부전나비뼈, 모르포나비뼈, 뼈, 뼈를 버린
무척추의 언어 무척추의 날개
손가락뼈가 없어 부드럽고 가슴뼈가 없어 순하구나 숨소리에도 모서리가 없어 친밀하게 내밀하게 더 가까이 다가가
세상 자유로운 나비를 사랑했다
몸 밖으로 뼈를 버리지 못한 나, 산제비나비 한 마리 키우고 싶지만 구석구석 모난 뼈가 많은 내 안에는 나비가 날지 않는다
잡았던 날개를 놓아준 두 주먹 사이로 푸른 공간이 생겼다, 푸른 공간을 날아 떠나는 날개, 날개들
놓아주어야 할 것이 날개뿐일까
한정우 시인 / 서해
바다가 빠져나가고 잿빛 영토가 광활하게 드러났다 방금 전 그리고 어제, 엊그제 뉴스로 전해진 바다로 투신한 사람들의 시신은 드러나지 않았다 여기 이 바다, 이 자리였던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은 빈 갯벌 위로 낙조가 드리운다 어디까지가 바다의 영토이고, 일몰의 붉은 경계인지 시신이 떠내려간 바다의 뒷면 어디까지가 죽음의 경계인지 불콰해진 갯벌 속의 갓 생명들은 끈적한 숨소리 내뿜으며 줄기차다
벌 가장자리에서 단단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물결무늬조개 하나 앙다문 아가리 속에 서해를 숨긴 침묵의 시간 밀물의 시간이 오면 천천히 입을 열어 숨겼던 바다를 울컥울컥 토해내리 목울대에 걸려있던 검은 뼈들을 와르르 쏟아내리
서해는 너를 품고, 너를 묻고 광활한 바다의 영토를 넘어 순환의 물때를 기다리고 있다
한정우 시인 / 나비는 뼈를 버렸네
제라늄 화분에 따라온 나비가 나비를 불러 집 안이 호접으로 가득 찼다
모나크나비뼈, 사향제비나비뼈, 부전나비뼈, 모르포나비뼈, 뼈, 뼈를 버린
무척추의 언어 무척추의 날개
손가락뼈가 없어 부드럽고 가슴뼈가 없어 순하구나 숨소리에도 모서리가 없어 친밀하게 내밀하게 더 가까이 다가가
세상 자유로운 나비를 사랑했다
몸 밖으로 뼈를 버리지 못한 나, 산제비나비 한 마리 키우고 싶지만 구석구석 모난 뼈가 많은 내 안에는 나비가 날지 않는다
잡았던 날개를 놓아준 두 주먹 사이로 푸른 공간이 생겼다, 푸른 공간을 날아 떠나는 날개, 날개들
놓아주어야 할 것이 날개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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