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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복주 시인 / 불안한 산골
불빛만 보면 무작정 덤벼드는 온갖 날벌레 뛰어들며 뛰어들며 나도 한 때 뛰어 들며 살았던 미망들 인두로 지진 머리 상처가 아물지 못했는지 오늘처럼 산 속 깊은 곳에 밤비가 내리면 불안하기만 하다 어디든 헤매여야 하는 역살을 이 곳에 박았는데도 이 곳 산골은 적막하고 쓸쓸하다 못해 불안하기만 하다 가뭄의 장마 끝 오감이 구멍마다 터지고 살아 있는 것은 모두 그리움 어제 패다 만 장작의 무게가 그대로 남아 나를 누른다 지리산 자락 아직 낯설어 가까이 어느 때는 멀리 아주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신선과 부처 어찌 그리 쉽게 만나지겠는가 산골에 와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조금씩 불안해지는 밤 아내는 무료하면 신혼시절 가져온 재봉틀을 돌리다가 불가에 쓰러져 잠이 들고 나는 곁에서 내일이 불안해 텃밭 가꾸기 책을 보다 쓰러진다 이제부터는 개구리 세상 박정만의 세상이다
문복주 시인 / 번개를 타고
아들아, 준비가 다 되었거든 번개를 타고 우주로 떠나자 우주의 산과 숲, 바다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더없는 추억과 기쁨이 되리라 아들아, 지난여름 철원 민통선 울창한 숲에서 금강 초롱꽃 만난 기쁨을 기억하고 있느냐 외설악 깊은 계곡 맑은 물에서 열목어 발견했던 기쁨을 기억하고 있느냐 우리가 우주 어디에선가 만나게 될 생명을 생각하면 우주여행은 기쁨에 가득 차는구나 지구외 지적생명의 탐사 일정표를 잘 갖추어 놓거라 별자리표와 우주 전파 망원경과 파이어니어에 실려 보냈던 우주인에게 보내는 메시지 금속판과 지구인의 인사와 음악을 녹음한 황금 레코드도 잊지 말거라 아들아,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라 백조자리 타우별과 에리다누스강자리 입실론 별에서 너는 놀라운 생명을 만나게 될지 어찌 알겠느냐 30만 개의 별이 모인 구상성단 M13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생명을 생각해보면 가슴 뛰지 않느냐 아들아, 가자.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번개를 타고.
문복주 시인 / 귀하의 예금을 돌려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저와 관계를 맺고 예금 계좌를 개설하시어 저를 항상 이용하여 주신 성원에 감사 드립니다. 귀하께서 늘 사랑해 주신 덕분에 이번에 승진되어 저 세상으로 발령 받아 전출 가게 되었습니다. 일일이 찾아뵙고 감사의 말씀 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함을 무척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갑작스런 전출이라 귀하의 예금을 미처 처리하지 못한 바 제반 절차를 거쳐 환급 대상 예금을 돌려드리고자 하오니 계좌를 확인하여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혹 애증이나 물질의 불편 부당한 사항이 있다면 후임 대리자 아들과 상담하여 주시고 그래도 해결하기 곤란한 사항이 있다면 직접 저의 세상을 방문하여 주시면 성의껏 처리토록 하겠습니다.
오랫동안 거래가 없어 휴면예금으로 처리되신 분이라도 작은 추억을 귀하의 소중한 재산이라 생각하여 돌려드리고자 하오니 해당 거래통장과 도장 신분증을 가지고 오셔서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깨끗하게 살자. 자유롭게 살자. 즐겁게 살자. 믿음으로 살자. 사랑하며 살자. 라는 운영방침 아래 각종 사업에 투자하였습니다만 적잖은 손실도 발생했습니다. 맡겨주신 예금을 잘 관리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어 나가는데 도움이 되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아쉬움이 남습니다만 다음 기회가 온다면 꼭 꿈이 맑고 아름답게 이루어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귀하의 가정에 건강과 행운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아 래 1. 정리기일:전출 전 2. 환급 대상 예금
문복주 시인 / 작은 꽃
내 여자 키 작다 손이며 옷이며 가방이며 젖가슴도 손안에 들어와 벗어나지 않는 저만한 아주 작은 꽃
화장실에 들어가면 치약 묻혀진 칫솔 놓여 있고 나오면 상큼한 팬티와 런닝 문가에 켜져 있고 흰 수건 들고 부끄럽게 서 있는
방을 들락날락 거릴 때 앞을 가로막으며 나와 춤추려고? 나랑 입 맞추려고? 나를 위한 시 쓰려고? 골든벨 울리는 하나 같이 작은 몸짓에 나는 그저 자자! 외친다
향기로운 풀꽃 숲에서 잠잔다 다리 하나 들어 여자의 허벅지에 올려놓고 팔 하나쯤은 미안스러워 괴어 놓고 꽃이 다치지 않기 바라며 꽃받침으로 기뻐 잠이 드는 여름날의 산골
문복주 시인 / 산굼부리 억새숲은 이별에 익숙하다
산굼부리 억새숲은 이별에 익숙하다 이별 뒤엔 바보같이 눈물 따라 다닌다 이별이 슬픈 것은 그가 떠나서가 아니다 바람이 불면 산굼부리 억새숲 전체가 일어서서 흐느끼듯 그를 위하여 불렀던 내 모든 기쁨의 노래 아우성쳐 나를 울리기 때문이다 산굼부리 억새숲은 내가 불렀던 나의 노래들을 바람으로 간직하고 내가 미친 듯이 달려가는 날이면 한 곡씩 풀어 놓는다 뜨거운 불을 움푹 파인 저 가슴 깊이 간직해 놓고 억새만 무성히 길러 바람 속 홀로 흐느끼는 너의 이별 나도 이제사 너의 이별이 눈물만이 아닌 것을 알겠다 이별이란 누구인가를 떠나 보내고 나서 아픔의 깊이로 파인 가슴의 웅덩이에 얼만큼의 진실이 고이는가를 확인하는 행복의 저울대임을 산굼부리 억새숲은 내게 가르쳐 준다
문복주 시인 / 칸타타
하늘 날고 싶었네 고추잠자리 칸타타 음률을 타듯 황혼 들판을 가벼이 빗살치고 싶었네 나는 정말 하늘 날고 싶었네 수리매처럼 까마득히 하늘을 날다 실종되어 보이지 않는 저 먼 세상에서 칸타타 아름다운 우리의 사랑 노래 부르며 자유로이 춤추고 싶었네
문복주 시인 / 제주 경마장 1번마
금악의 벌판을 말이 달린다 숨차게 달린 바다의 끝에서 더는 달릴 수 없어 운명을 거꾸로 세운다 고삐 풀고 어디라도 달린 야생마는 운명의 주인을 탓하지 않는다
풀을 뜯다 일순 문이 열리면 제주 경마장 1번마는 달린다 환호 속에 전력으로 질주한다 내가 달린 것은 트랙이 아니라 야생의 찔레꽃 들판일 뿐
대지의 냄새가 슬금슬금 나고 가시가 살갗을 속속들이 찌르고 갈기 날리면 생의 비늘들이 반짝이고 출렁인다 나와 함께 쏜살같이 비껴나간다
살아있는 동안 피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리움으로 달리는 질주 쇠사슬을 끌고라도 달려야만 살아있음을 느끼는 나는 제주 경마장 1번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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