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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문석 시인 / 뭉크의 바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7.
나문석 시인 / 뭉크의 바다

나문석 시인 / 뭉크의 바다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비굴한 날

우리는 장생포항으로 갔네

지금은 고래가 잡히지 않는 그곳

항구의 고래고기집

러시안 귀신고래, 장생포 밍크고래

시를 말하려다 인간을 말하고 인간의 말들은

우왕좌왕, 말 폭탄 되어 핵을 만든다

바다는 제 말을 하고

술고래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뒤틀린 틈 사이

등이 터져버린 새우, 벌떡 일어나

깡소주 한 잔 냅다 들이키고

바다를 향해 소리친다

니들이 내 깡을 알아!

아무런 힘이 없는 자의 깡다구

절규가 되어 바다로 뛰어든다

 

ㅡ남동해의 밤을 밝히는 『아시아의 촛불』(작가시대, 2013)

 

 


 

 

나문석 시인 / 거품을 물었다

 

 

샤워를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지치면 끊겠지,

비누칠을 한다

 

벨은 끊기지 않고 끈질기게 울어댄다

휴일 밤중에 어떤 웬수놈인가

폴더를 열어보니

!!!

 

얼른 통화버튼을 누르고

어인 일이신가 했더니

다짜고짜 다 벗어 던지란다

깜짝 놀라 비누거품 잔뜩 발려 있는

알몸을 쳐다보는데 이번엔

좇도 다 필요 없어!

……………….

 

끊어질듯 이어지는

통화가 끝났을 때

거품이 말라붙은 알몸엔

물기 하나 없었다.

 

-문학무크 『시에티카』(2011. 상반기 04)

 

 


 

 

나문석 시인 / 악양에서 시인을

 

 

죽은 시인을 만나러 하동을 간다

형제봉 아래 구절초 흐드러진 시인의 생가

탈진한 시간들이 허연 뼈를 드러낸 텃밭에

그리움으로 흐느끼는 잡풀들

그 사이를 서성이던 시인의 옛 자취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강물이 되었다

물의 중심에 발자국을 찍는 바람

눈을 감아본다

눈을 감자 더욱 또렷해져 오는 그대

먼 곳에 있는 그대가 남긴 언어들이

섬진강을 걸어가고 있다

 

 


 

 

나문석 시인 / 슬픈 술

 

 

인쇄공 이씨는

한 방울의 술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인데

지난 밤 음주단속으로 한바탕

고역을 치르고 말았단다

피를 토하듯이 억울한 사연을 꺼내 놓는데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술이 되었다

 

인쇄를 하는데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공업용 알코올인데

하루 종일 일하다 보면 코로만 들이킨

알콜지수가 소주반 병이 넘는단다

제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걸 알아주지 않는 경찰관이

에프엠 같은 음주측정기로만 닦달을 하고

나중에는 술 마시고 오리발 내미는

못된 놈으로까지 치부를 하더란다

분을 삭이지 못한 그가

정말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세상이 온통 아지랑이처럼 빙빙 돈다며

토악질을 하다가 쓰러졌다

생각하수록 슬픈 술

 

-시집 『정삼각형 가족』시와에세이. 2014 중에서-

 

 


 

 

나문석 시인 / 무섬마을에서 하룻밤

 

 

길이 끝나는 곳에 섬이 있다

섬이 없는 섬에서

물 위에 떠있는 섬에서

외나무다리에 촘촘히 박아놓은 마음들이

물속에 발을 담그고

강물속에 빠져있는 술병을 건진다

술병에서 술이 빠져나오고

취한 나그네는 혼이 빠져나온다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방새를 그리는

물정 없는 화가와

열네 살의 꿈이 아직도

오동낭구에 걸려있는 시인들을 위해

끝도 없는 농담을 윤회처럼 거듭하던

그의 이름은 윤회란다, 김 윤 회

보이지 않는 별자리까지 더듬어

밤새 우주정거장을 만들고

잘 마른 꽃잎 같은 노래

사랑하는 이를 위해 불러주는 이

어떤 인연이 이리도 고울까

뽕나무에 익어가는 오디처럼 달콤한 밤

마술처럼 사라지는 시간

없는 것이 있다 다시 사라지는

지상에 존재하는 무섬마을에

달이 짖는다

 

 


 

 

나문석 시인 / 유령놀이

 

 

극락강을 건너온 눈바람이

온 누리 하얗게 칠하는데

창가에 선 백발의 어머니, 밤새도록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다린다

누워서 기다려도 오신다고 했지만

소용이 없다

 

지나가는 기차소리에

놀란 눈으로

통근열차 놓치면

작업반장한테 혼난다고

안달하는 어머니

도시락 가방을 챙겨 들고 기어이

방문을 나서려고 한다.

 

동이 트려는지

창밖이 밝아지기 시작하는데

태어나기도 전의 날들이

굵은 눈발이 되어

허공을 가득 채우고

 

울 엄니 내일 아침에 시집간다고

새색시 화장을 시작한다

 

* 영산강과 황룡강의 분기점에서부터 광주천이 나누어지는 지점까지를 극락강이라 부른다.

 

-시집 『정삼각형 가족』, 시와에세이, 2014.

 

 


 

 

나문석 시인 / 훔치고 싶은 시(詩)

 

 

깊어가는 어둠 속

늑대의 발소리 낡은 천정을 흔들고

살쾡이인지 바람의 날개인지

밤새 문풍지를 갉아먹는 날

기척도 예고도 없이

자살보다 깊게 절망스런 이 산하를

눈(雪)부시게 통일한

저이는 누구인가?

 

-『시에』 (2011. 봄)

 

 


 

나문석 시인

대구에서 출생. 1975년 '오구문학'동인으로 시작활동. 2009년 계간 《시에》로 등단. 시집 『정삼각형 가족』. 도서출판 <두엄>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