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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문헌 시인 / 동안거에 들다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7.
송문헌 시인 / 동안거에 들다

송문헌 시인 / 동안거에 들다

 

 

어디가 꽃길이고 어디가 낙엽자리인가

바스락 우두둑 바람에 골절되는 가랑잎들

고요의 뼈를 들추는 경계를 지운 산

나를 불러들이고 허둥지둥 지나온 길

돌아가는 길 또한 오리무중

 

누가 누구의 길을 끝까지 동행하고

누가 누구의 삶을 대신할 수 있는가

네가 내게 마음이 없으면 오지 않을 터

내가 네게 길이 없으면 가지 못할

 

눈을 뜨면 어느새 산빛 풀빛 본연의 모습

전광석화 번쩍 오가는 시간의 화살도 잠시

머물지 못하고 떠나가네, 그렇게 낡아 사라지네

 

사람들아, 참선 중인 저 고요 깨우지 마라

 

 


 

 

송문헌 시인 / 山寺 3

 

 

 탁,탁,탁,탁.똑,또르르르...

 

 목탁 치는 소리에 선잠에서 깨어나니 아침 공양 시간이었어요 새벽 예불이 끝나고 깜박 잠이 들었나 봅니다 미닫이문을 활짝 열고 덧문도 벌컥 여니 철늦은 눈이 절 마당 가득 눈부시어 반가움에 서둘러 나오니 댓돌 위에 흰 고무신까지 하얗게 품고 있었습니다 눈에 갇힌 요사체 뜨락을 앞뒤로 돌며 서성이다 산골창을 올려다보니 울창한 가지마다 솜사탕을 매달은 듯 눈꽃이 현란하게 숲을 이루어 꿈결 어느 다른 산사에 와 있는 듯 신비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요사체에서 법당 봉당으로 水閣으로 그리고 공양간으로 한 줄로 자리한 사잇 계단을 껑충 껑충 건너뛰어선 넉가래를 들고 변소 가는 길을 밀고 갔습니다 절간 변소는 대부분 멀리 떨어져 있잖아요. 이곳은 유난히 더 멀어서 똥 뒷간 가는 중간쯤 산비탈 오솔길 옆에 벽돌을 쌓아 칸막이를 하고 붉은 플라스틱 들통을 놓아둔 오줌통에 닿자마자 급한 김에 바지가랑이 속 그놈을 얼른 내놓고 쏴 내 깔기니 시원키도 하여 저절로 눈을 감았지요 진저리를 치며 눈을 뜨니 오, 오줌통 너머 산비탈에 가지를 늘어트리고 나의 그것을 지켜보는 생강나무 아름다운 꽃이여 산수유 같은 샛노란 꽃 둥지로 소복소복 피어있는 그 노란 꽃이 하얀 눈꽃송이에 살포시 안긴체 황홀하게 피어 수줍어 고개 숙이고 나의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단 말인가 영하의 긴긴 밤을 짝을 지어 얼싸안고 밤새 사랑을 나눴단 말인가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질긴 살아 있음은 또 어떤 수행에서 얻어지는 것일까 그런 생각으로 방에 들어와서도 한참을 이리뒹굴 저리뒹글 하다가 절 지붕 銅器瓦를 타고 추녀 아래로 비오듯 눈이 녹아 내리는 소리에 밖으로 귀를 기우리니 山中 어디선가 툭 하고 소나무 가지 부러지는 파열음이 가슴을 철렁하게 했고요 후두둑후두둑 눈꽃 떨어지는 소리에 조바심 나 눈 속에 핀 생강나무 꽃을 찾아갔지요 밤새 사랑을 나눈 기진 함에서일까 옷매무새도 가다듬지 않고 꺼칠한 모습으로 히죽히죽 이른 아침 방문을 열고 나오던 어느 정분난 과부가 그랬던 것처럼 꺼칠꺼칠 늘어트린 노란 꽃 봉만이 헤식 거리고 있었지요 그날, 그날은 괜 시리 나도 질척거리는 산길을 한 나절이나 싸 다녔지요.

 

 


 

 

송문헌 시인 / 배추흰나비

 

 

겨울 병동에서 갓 퇴원한

삼월

햇살 같다

 

 


 

 

송문헌 시인 / 겨울 검단산

 

 

 유길준 묘에서 경사진 길을 따라 산행 들머리를 잡으면 산의 높이에 따라 펼쳐지는 산아래 모습. 비행장 활주로처럼 검게 펼쳐진 미사리 강변도로 덕소의 아파트촌 휘돌며 내달리는 강물. 정상을 향해 오를수록 평면으로 펼쳐지는 하남 시가지와 멀리 강남벌의 아슴한 회색 도시가 낯설다. 팔당대교 아래로 추락하는 하얀 포말들의 거친 물줄기가 당차고 통쾌하구나. 산꼭대기를 향해 치닫는 마음은 헐떡이는 발걸음 재촉하고 사방팔방으로 거칠 것 없는 정상에 서면 빼어난 여인네 몸뚱어리인 양 예봉산이 비스듬히 누워 반긴다 아련한 운길산이 운무에 삼삼한데 둘러선 양평산 운길산 멀리 도봉산 북한산이 든든하게 다가선다. 겨울의 검단산 거침없이 불어대는 바람이 차다

 

 


 

 

송문헌 시인 / 새벽달

 

 

불 꺼진 산번지 교회 첨탑 위에

저무는 섣달

하현달이 서리서리 차갑다

자동차소리도 얼어붙었을까

취객들 소리조차 뚝 끊겼다

어깨 구부러진 골목길 내닫는

쇠바람 소리 사이로 굼실굼실

달빛 하얗게 휘청거리는 가랑잎 포장마차

덜커덩덜커덩 정적 속으로 끌려가고

산동네에 지는 새벽달

혼자서 섧다

 

 


 

 

송문헌 시인 / 전쟁은 아직,

 

 

´분명 여기 어디였는데,

그해 여름 피 묻은 시신을 묻어야했던 거기가...´

산을 헤집고 다니다가 문득 멈춘 그곳

 

(수풀 우거진 화전민 집터를 찾아낸 K씨, 유해발굴에 나선

후배 전우들과 산을 파헤친 지 얼마 후 얼기설기 구부려 누운 채 드러나는

일곱 유골들, 정성을 다해 미안한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절을 올린다.)

 

54년만의 만남!

 

뼈마디 곳곳에 총알이 박히고 군화도 벗지 못한 채 춥고

습기 찬 곳에 누워 뼈인지 낙엽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그들,

 

잊혀져 까맣게 소홀했던 너무나 소홀하였던 우리들 우리는

무엇이며 조국은 그들에게 무엇인가 땅속에서 나온 그날의

전우들이 절규한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송문헌 시인 / 적막강산

-바람의 칸타타 ․ 21

 

 

 (거리마다 은행나무들 금과 은으로 물들어, 얼굴을 스치는 작은 바람에도 우수수 시간을 털어냅니다 시월이 저무는 지난 주말 한 낮, 막내도 장가를 보냈습니다 새아기는 하늘하늘 코스모스 맑은 눈을 가진 아이랍니다 얼굴에 가득 아직도 개구쟁이 티 가득한 그 애)

 

1.

목덜미를 파고드는 바람이 스산합니다 그 아이들은 지금쯤 어느 낯선 하늘 어느 꿈 아래서 잠들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직은 생존의 고달픔이 무엇인지 모른 체 한껏 젊음과 새 출발을 자축하고 있으려니, 고마울 뿐입니다 그 애들이 세상을 알아가며 힘겨운 날에도 물러서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하며 오직 축복이 가득 하길 일월성신께 축원하고 기원 할 뿐입니다

 

집안엔 저뿐, 에미는 그날 찾아준 벗들과 함께 하느라 종일 외출중입니다. 비워둔 집안은 어둑 저녁 현관을 들어서자 온몸에 가득 냉기가 낯설게 다가옵니다 불을 밝히자 환하게 막내의 모습이 곳곳에서 다가섭니다 벗어놓은 신발을 보니 금방이라도 ‘늦었습니다!’ 하며 그녀석이 현관을 들어서는 것만 같습니다 녀석은 떠나갔지만 그녀석이 온 집안에 가득 합니다 차마 그 아이 방문을 열어 보지는 못했습니다

 

2.

머지않아 들녘엔 눈 내리고 벌거벗은 가로수 저 혼자 새봄을 꿈꾸겠지요 차가운 겨울을 견뎌내야 하는 저 가로수 같이 가진 것이 넉넉잖아 무엇 하나 갖춰주지 못한 체 제금을 내야하니 천둥벌거숭이를 차가운 겨울바닥으로 내모는 것만 같아 제 에미는 몇 날 며칠 눈물을 찍어내니 그저 미안할 뿐입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잠이 들었는지 잠든 척 하는 것인지 에미는 기척 없고 세상이 적막강산입니다 어둑 곳곳에선 여전히 막내가 휘젓고 다니지만 모른 체 이만 불을 끄렵니다, 아버님

 

 


 

 

송문헌 시인 / 아직도 마라도에서 애기업개는 울고 있는가

--바람의 칸타타ㆍ20

 

 

 오래전 모슬포에 살고 있었다는 이씨부인, 부인은 어느 날 물질을 나가다 수풀 속에서 울고 있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아이를 데려다 딸처럼 길렀다 한다. 여덟 살 될 즈음에 이씨 부인에게도 다시 아기가 태어났고 여자아이는 자연스레 아기를 봐주는 애기업개가 되었다고, 그 시절 마라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금단의 땅, 섬 주변은 전복 소라 굴 조개며 톳 미역해산물들이 풍부했지만, 그것들을 잡으면 바다의 신이 노해서 거친 바람과 흉작으로 화를 입는다 하여 누구도 접근을 꺼려했다고, 어느 파도 높은 해 봄, 모슬포 해녀들이 마라도 해안에 배를 대고 소라 전복 엄청나게 많이 잡아 섬을 떠날 준비를 하자, 갑자기 비바람치고 바다는 금세 거칠어져 아무도 섬을 떠날 수 없었다고, 그날 밤 해녀들의 꿈속에 ‘애기업개를 두고 가지 않으면 모두 물에 빠져 죽을 것’이라고 천둥은 하늘 가득 으르렁거렸다 하네.

 

 “나도 데려가 줍서! 제발 데려가 줍서!”

 발바닥이 찢어져라 해안으로 달리며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으리

 바다로 빠져나가는 배는 그러나 뒷모습만 아득할 뿐

 

 잊은 듯 몇 년이 지나 다시 마라도에 들어간 사람들은 고스란히 육탈의 흰뼈로 남아 바다를 향해 울부짖고 있는 애기업개 소녀의 절규를 환청으로 듣고 있었더란다.

 

 애기업개당을 짓고, 소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길일엔 지금도 제물을 바치고 정성스레 제를 올리는 그 섬사람들, 정성의 효험이었을까 섬을 빙 둘러 온통 가파른 절벽이지만, 그 험한 바다에서 물질을 하는 해녀들은 물론, 바위투성이의 바닷가에서 묘기 부리듯 노는 마을 아이들조차 아직도 다치는 일 한번 없었다 하네

 

 어쩌다 외지사람들이 애기업개당을 함부로 할라치면 일주일 내내 바람이 불어 꼼짝없이 섬에 갇히게 한다고, 이틀이 멀다며 밤이면 창 밖에서 소리 높여 슬피 우는 그 소녀는 아직도 어미 잃은 설음에 섬을 떠돌고 있는지

 

 봄이 와도 마라도엔 물새소리 한 번 들리지 않는다

 

 


 

송문헌 시인

충북 괴산 출생. 1994년 월간 <문예사조>로 등단 <시문학>, <시와시학> 등을 통해 작품 활동. 시집 <눈이 내리면 외포리에 가고 싶다> <아라리는 아직도 이거리에 있다> <그물에걸린 바다>. 2002년 제16회 한국자유시인협회상 수상.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가곡작사가협회 회장. 한국문인산악회 부회장. (사)한국현대시인협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