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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은 시인 / 분더캄머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6.
오은 시인 / 분더캄머*

오은 시인 / 분더캄머*

 

 

과거는 왜 항상 부끄러운가?

미래는 왜 항상 불투명한가?

 

방문을 열면

얼굴이 화끈

배속이 발끈

 

허기를 참지 못하고 또다시

너를, 너희들을 소환한다 오늘

 

누구나 소유할 수 있지만,

아무나 소유하지는 않는

 

새로운 친구가 왔단다

 

너희들는 서로 인사를 하지 않는다.

지분을 배정받은 공유자처럼

묵묵하고 꿋꿋하다

우정 따위의 지나친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너희들이 더 많아질수록

너희들이 더 다양해질수록

나는 더 작아지고 적어진다

 

재능이 넘치면 노력이 부족해

시작이 창대하면 끝이 미약해

 

어떤 경지에 오르려다

어떤 지경에 이를 수도 있지

 

배 속을 다 채우면

나는 예정대로 구역질을 한다

신물나는 완벽함을 향해

 

빛나가면서 빗나갈 때

뒤쳐지면서 뒤처질 때

 

놀랍게도

나는 방 안에서 놀라워진다

내 방을 누가 들여다볼까봐

밖에 나가기가 두려워진다

 

눈을 감아도 네가 보인다

너희들이 빤히 보인다

 

아, 대체 나는 어디에 발을 들였단 말인가

내 앞에 도래하는

백지상태의 내일 앞에서,

새로운 친구같이 어색하기만 한 나는

 

*분더캄머 : 독일어로 '놀라운 것들의 방'이라는 뜻. 카메라가 발명되기 전, 특별한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사람들은 자신들의 방에 물건을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방은 '분더캄머(Wunderkammer)'라는이름으로 불렸다.

 

 


 

 

오은 시인 / 생일

 

 

축하해

앞으로도 매년 태어나야 해

 

매년이 내일인 것처럼 가깝고

내일이 미래인 것처럼 멀었다

 

고마워

태어난 날을 기억해줘서

 

촛불을 후 불었다

몇 개의 초가 남아 있었다

 

오지 않는 날처럼

하지 않은 말처럼

 

죽을 날을 몰라서

차마 꺼지지 못한 채

 

 


 

 

오은 시인 / 만약이라는 약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라면

지하철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바지에 커피를 쏟지 않았더라면

승강기 문을 급하게 닫지 않았더라면

 

내가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채우기보다 비우기를 좋아했다면

대화보다 침묵을 좋아했다면

국어사전보다 그림책을 좋아했다면

새벽보다 아침을 더 좋아했다면

 

무작정 외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날 그 시각 거기에 있지 않았다면

너를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 말을 끝끝내 꺼내지 않았더라면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닦아주는 데 익숙했다면

뒤를 돌아보는 것보다 앞을 내다보는 데 능숙했다면

만약으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하루하루를 열고 닫지 않았다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햇빛이 들고

바람이 불고

읽다 만 책이 내 옆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만약 내가

어젯밤에 이 책을 읽지 않았었더라면

 

-시집 『유에서 유』 문학과지성사, 2016

 

 


 

 

오은 시인 / 아침의 마음

 

 

눈을 떠도 다 보이는 것은 아니다

세수를 해도 다 씻기는 것은 아니다

 

걷고 있다고 해도

꼭 어디론가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가만있다고 해도

법석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심장이 뛸 때마다

속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발끝에 고인 눈물이

굳은살로 박이는 아침

 

바깥이 밝다고

안까지 찬란한 것은 아니다

 

-시집 <마음의 일>에서

 

 


 

 

오은 시인 / 많이 들어도 좋은 말

 

 

많이 들어도 좋은 말에 대해 생각한다

들을수록 깊어지는 말에 대해

 

잘했어, 잘했어, 잘했어............

잘했다는 말이 반복되니 다음에도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생겼다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어떤 고마움은 반복되면 기계적으로 느껴진다

 

행복해, 행복해, 행복해............

매일 행복하다는 주문을 걸다 정작 커다란 행복이 찾아왔을 때 당황하곤 한다

 

그리고 딱 한 번뿐이었어도 좋았을 말

미안해

 

깊이는 횟수와 상관이 없구나

목말랐던 어떤 말을 들으면

마음의 우물이 저절로 깊어진다

 

-시집 <마음의 일>에서

 

 


 

 

오은 시인 / 짠

 

 

잔이든 시선이든

마주칠 때

액체가 흐른다

 

마음에 금이 간다

 

집에 오늘 길에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림자가 제대로 있는지

발자국이 제대로 찍히는지

혹시라도

 

주워 담을 것이 있는지

한방울이라도

 

마주치되 맞추지는 못해서

거리를 늘 파편이었다

 

 


 

 

오은 시인 / 졸업 시즌

 

 

더 이상 들을 수업이 없는데도

학교에 남아 있었다

갈 데가 없었다

 

빛나는 졸업장은 곧장 서랍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서랍 속에서 나날이 빚이 날 것이다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뭉쳤다

갈 데가 있는 친구들은

옷을 사고 차를 사고

이성의 환심을 사고

갈 데가 없는 우리는

양심을 파는 대신

쌀을 팔기 위해

사서 고생하기로 마음먹었다

 

안 될 걸 알면서도 하는 일이란

몸과 마음을 다 주어야 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투명인간이 되어간다

 

어제는 미래를 상상했고

오늘을 오늘을 경험했고

내일은 어제를 후회했다

 

시간은

빛이 달아난 속도처럼 빠르거나

빛이 불어나는 속도처럼 더 빨랐다

 

졸업 직전, 친구 중 하나가 휴학했다

졸업 직후, 친구 중 하나가 대학원에 갔다

 

학교에 발붙일 틈이라도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갈 데가 없어서

우리는 구내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

 

밥을 먹으려고 입을 벌렸는데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 나중에 이런 식당 하나 차리자

 

꿈보다 해몽이 좋구나

꿈이라도 꿀 수 있다면

 

-시집 『유에서 유』 문학과지성사, 2016

 

 


 

오은 시인

1982년 전북 정읍시 출생. 서울대학교 사학과 졸업.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석사. 2002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 『왼손은 마음이 아파』 『나는 이름이 있었다』. 2019년 제27회 대산문학상 시부문 수상. ‘작란(作亂)’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