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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성영희 시인 / 쉼표의 감정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6.
성영희 시인 / 쉼표의 감정

성영희 시인 / 쉼표의 감정

 

 

그림자가 길어질 때 우린 가던 길을 멈췄다

 

여기서 저녁을 배웅하자

 

어서 외투를 입어

 

차가운 물빛이 당신의 이마에 흘렀다

 

물끄러미

 

기울어진 살결 담아내기 위해

 

나는 지문을 지우고 있는 의자를 건넸다

 

,

 

이젠 실컷 소리 내어 울어도 좋아

 

-시집 『창』 2022

 

 


 

 

성영희 시인 / 명륜(明倫)

홍성군 결성향교에 가면

아버지 같은 느티나무와

어머니 같은 팽나무가 양팔 벌려 반기지

하늘 향해 솟구친 느티나무는

아버지 굳은 의지와 같고

잔가지 사이사이 열매 품은 팽나무는

쓴 물 단물 다 내어주고 주름만 남은 어머니 같지

이슬에 부리 닦은 참새들이

햇살에 날개 펴고 날아오르듯

명륜당 마당에 쏟아진 달빛은

신발마다 발자국마다

길고 짧은 입신양명을 신기지

명륜, 이라 이름 밝혀 놓으니

인륜과 전당이 단번에 들고

활짝 열린 외삼문처럼

대성전 처마에서 늙어가는 막새처럼

온갖 눈비바람볕 꿋꿋이 받아내고

육백 년 수호하는 저 기백(氣魄)

간밤 늦은 꿈엔 헐벗은 팽나무에 새순 돋았지

파릇한 이파리 샛별처럼 반짝였지

 


 

 

성영희 시인 / 못박는 나무들

산은 편애가 없습니다

세상에 나무만 한 수도자가 있을까요

가는 것 두꺼운 것 어린 것 늙은 것

수종을 가리지 않고 밤낮 뿌리를 내립니다

가옥이 헐렁해지면 바람에 날아 갈까 봐

스스로 부실한 곳을 찾아 못 박는 거지요

한번도 자리를 옮긴 적 없는 가부좌

굳어버린 관절은

어린 새들의 요긴한 둥지가 되기도 합니다

산짐승들은 살림살이가 비루해도

불평으로 뒤척이거나 불편해하지 않습니다

장마에 쓸려나간 산자락에

인부들이 나무를 심고 있습니다

못이라도 박듯 자리를 고르고 발로 꾹꾹 밟아요

옆구리가 결리겠지만 내색 없이 안아주는 품

안개를 끌어다 덮고

풀벌레 소리를 끌어다 덮고

그 위에 검은 밤을 끌어다 덮으니 이불이 됩니다

오늘 밤 새로 이사 온 나무들은

아주 곤한 잠을 자겠지요

늙은 참나무 가지에

안간힘으로 버티는 빈집이 있어요

어린 가출을 기다리며

여름의 끝을 꽉 움켜쥐고 있는 곤충껍질들

겨울이면 제 몸의 물기를 모두 빼서

어린 생명들을 덮어주는 것도

나무들의 득도일 것입니다

긴 겨울 동안 흰 눈을 덮고

꽝꽝 못 박힌 나무들 좀 보아요

늦은 밤, 눈보라 뚫고 귀가한 아버지 같아요

 

 


 

 

성영희 시인 / 모서리 꽃

 

 나는 모서리를 좋아해요. 저 둥근 달도 수많은 모서리를 감추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달 속에 계단을 쌓고 싶어요.

 

 모서리가 없어진 내 자동차는 자주 아파요. 반짝거린 것들은 다 모서리였을까요. 그래도 나는 내 찌그러진 모서리들을 데리고 가끔 여행을 떠나요.

 

 사라진 모서리들을 모두 모으면 붉고 푸른 꽃묶음을 만들 수 있을까요. 깊이 박힌 모서리를 끌어안고 잠드는 밤은 움푹 들어간 꿈을 꾸기도 해요.

 

 모서리 없는 지도는 없고 모서리 없는 이정표도 없네요. 모든 길은 그러니까 모서리의 시작이라니, 꽃을 만들지 못한다면 내 늙은 자동차는 이제 바퀴를 버려야 해요.

 

 레미콘 차에 실려 온 둥근 모서리들

 인부들은 그것들을 굳혀 직각을 만들고 비스듬한 그림자를 건설해요

 그렇게 굳어지는 순간

 상대편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角

 

 모서리 앞에서 잠시 외면하거나 주춤거리는 것은

 엎지르고 온 어느 모서리가 있기 때문일까요.

 보폭을 좁히면 보여요.

 직선도 곡선도 편애하지 않는 긍정적인 面

 

 모서리 하나가 길을 구부리고 아침 햇살을 반으로 접어놓아요. 저녁이면 길게 누워 사라지는 그림자들. 그러므로 어제나 내일은 오늘의 모서리를 지나치고 있는 중이죠.

 

 始動을 걸어도 될까요.

​​

-인천문단 2023년 52집 발표

 


 

 

성영희 시인 / 여름궁전

 

 

 폐허를 두들겨 빨면 저렇게 흰 바람 펄럭이는 궁전이 된다. 매일 바람으로 축조되었다 저녁이면 무너지는 여름궁전은 물에 뿌리를 둔 가업만이 지을 수 있다. 젖은 것들이 마르는 계단, 셔츠는 그늘을 입고 펄럭인다.

 

 몸을 씻으면 죄가 씻긴다는 갠지스 강 기슭에서 두들겨 맞다 이내 성자처럼 깨끗해지는 옷들, 어제 죽은 이의 사리*를 계단에 펼쳐 놓고 내일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헹구는 도비왈라들, 거품 빠진 신분들이 명상처럼 마르고 있다.

 

 이 강에서 고요한 것은 연기 뿐,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밤이면 강물은 다시 태엽을 감고 소리를 잃은 것들은 물결이 된다. 화장장의 연기도 무시로 강물 따라 흐른다. 앞 물결과 뒷 물결이 섞여 흐르는 이곳에 오늘이 있고 산자만이 빤 옷을 육신에 걸칠 수 있는 내일이 있다.

 

 물소리를 베고 잠들면 잠결에도 물이 흐를까, 사내들의 팔뚝은 강기슭을 닮았다 끊임없이 궁전을 세우지만 그 안에 들 수 없는 불가촉 타지마할, 하얗게 펄럭이는 그들만의 궁전이다

 

* 인도의 여자 의상

 

 


 

 

성영희 시인 / 간다, 라는 말

 

 

가고 싶은 곳에는

가고 싶은 곳과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반반이다

횡단보도 중간지점에서 문득

뒤돌아 서성이다 맞는다

급한 경적 같은 것

 

배냇 웃음과 주름 말씀만 접었다 폈다 포개는

어머니 입에 붙은 헛말, 가야지

난처한 귀를 두 개나 가진 옆 할머니를 붙잡고

함께 가자고 한다

 

어머니 정말 가고 싶은 곳은 어디일까

가고 싶은 곳이 다 귀찮아질 때

요새 같은 마지노선

편도의 티켓을 끊고 개찰을 기다리는 것이다

여기까지 왔다는 말도 과거로 가면

간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앓기 전에는 모르는 신열같이

기억에서 한 겹씩 얇아질 때마다 가까워지는 종착지

 

내일이 있어 내일로 가는 것처럼

제일 가기 싫은 곳이 가고 싶은 곳 되는

어머니의 그곳,

 

 


 

성영희 시인

충남 태안 출생.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2017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1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섬 생을 물질하다』 『귀로 산다』 『물의 끝에 매달린 시간』. 2015 농어촌 문학상, 2014 제12회 동서문학상 수상. 2019 인천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