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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식 시인 / 수상한 뿌리
죄가 수상하여 해부하다
罒; 천지사방이 그물이다 非; 긴 수염 뿌리다 罪가 수상한 뿌리를 살찌운다
사랑과 죄는 달콤하다 시체애호증이 있다 시체가 시체를 사랑한다 시체가 시체와 동거한다 윤리와 사랑이 죄의 벽 속에 갇힌다 수상한 꽃잎이 날마다 숲을 향해 달리고 강을 건넌다 퇴적물에 쌓인 두 구의 시체가 창가로 날아간다
사랑과 죄는 다정하다, 미술관에 걸린 수상한 뿌리 신이 ‘황금의 비’로 간음한다 수상한 뿌리가 죄를 살찌운다
-2010 겨울호 계간 <예술가> 신인상 당선작
지연식 시인 / 아바타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나비가 내 꿈을 꾸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
나는 핏빛 상실의 피그말리온 바람이 다가오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童話에 지나지 않았다 바람이 그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갈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하나의 꽃이 되었다
나는 이미지를 포식하며 수용하는 자 바람이 나의 등을 훑고 지나갈 때 꽃은 휘어지기 시작했다
바람이여 나의 잎새들이 아프다 나에게 가벼운 숨결을 부여해다오 멀리 혹은 가까이 네 황금 손바닥으로 나를 들어 올려다오 빛나는 공기의 피륙을 입혀다오
내 이름을 불러다오
*장자 호접몽
지연식 시인 / 연장의 노래
수선의 방은 쇠밭이다 그곳에선 늘 쇠풀 냄새가 난다 바늘, 핀, 송곳. 작은칼, 쪽가위 - 다섯 손가락 드라이버, 큰가위, 다리미, 재봉틀, 오버룩 - 다섯 손가락 두 손이 분주할수록 쇠풀 냄새, 종일 향기롭다
연장이 엮어놓은 길 털털털 걷던 낡은 바짓단 속에는 새의 날개가 곱게 접혀진 길이 있다 외진 흙길을 바람처럼 내달리던 거슬거슬한 길이 있다 실의와 희망을 박음질하는 겨울 캐시미언 코트 끝자락에 예리하게 빛나는 구도자의 노래
쇠밭에 뒹굴면 천둥소리만큼 시끄러운 모터 소리 팽팽한 피대를 껴안은 바퀴가 그의 삶이다 연장의 노동이 즐거운 터진 곳을 눌러 박는 노루발이 그의 힘이다
묵직한 연장 하나가 기적을 울린다 그는 지금 저 안개 속에서 어둠의 옛길을 지우는 중이다 폴*의 강을 건너 새롭게 거듭나는 중이다
* 반생을 폭력 속에서 살다가 강에서 사람들을 업어나르는 것을 덕으로 삼아 마침내 예수의 발현에 접함
지연식 시인 / 주홍글씨
고속도로가 없는 하늘. 그래서 그런가? 새들의 문화가 옥양목처럼 정갈하다, 말하지.
사는 곳이 허공이지. 거주지불명에 번지수가 없지. 아무것도 없지. 아무도 없지.
지상이 새들의 변기통. 새똥으로 가득 찬 에펠탑. 인형의 집. 유리 속 마네킹. 드라이 플라워. 핀으로 고정시킨 나비. 헤스터의 진홍색 티셔츠.
오월의 장미 A. 엄마를 한껏 사랑하지 못한 바늘. 엄마를 말려 죽인 바늘. 여행조차 함께 가보지 못한 바늘. 옷자락 밑으로 우연히 드러난 마녀의 알몸이거나 땅에서 발견된 짐승의 뼈일 수 있지. 손가락질한 바늘. 상처 입힌 바늘. 부도난 바늘. 바늘이 날마다 귀속을 콕콕 찔러댔지. 근데 참 이상하지. 피 한 방울 없었던 게.
손톱을 물들였지. 손톱에 꽃을 심었지. 손톱에서 꽃이 자랐지. 내 꽃을 아무리 길러도 예쁘지가 않아. 꽃을 거세했지. 손톱을 거세했지. 손톱 날을 거세했지. 나다니엘 호손.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못했지. 엄마를 부르면 엄마가 듣지 못할까 봐.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을까 봐. 엄마를 골목에서 나 혼자 키웠지. 엄마가 나를 알아볼 때까지, 엄마의 살점을 뜯어먹고 살았지. 세상, 그 육질의 달콤한 맛이라니. 근데 참 이상하지. 엄마에게 피 한 방울 없었던 게.
기억하고 싶은데 생각나지 않았지. 생각하고 싶은데 기억 나지 않았지. 말없이 사각형을 그리고, 그려진 추운 계절에, 달력을 찢어 주머니에 구겨 넣어, 歷史를 도망쳐 나왔지. 탈옥수마냥?
표류하고―표류하고...... 한없이 흘러갔지. 죽음에 소리가 흘러들까 생각했지. 물속으로 사라졌지.
지연식 시인 / 소년, STAINEDGLASS
유리벽에 붙은 스테인디드글라스 포스터.
유리조각을 붙여서 그렸지. 금발 은발 흑발의 生涯. 기이한 일로 가득 찬, 아방가르드. 미술관에 설치된 곤돌라.
유리소년이 유리식사를 하고 유릴 배설하지. 반사광이 눈꺼풀을 꿰뚫지. 직선의 파편. 이마로 피 흘리는 소년아,
네 고통을 이리로 데려오렴, 네 불행을 가지고 오렴.
천체를 찢는 까마귀 울음소리, 듣기만 해도 겁나지. 금발의 소년아, 단단한 네 뼈를 참빛으로 빗어 봐. 타오르는 밀밭을 달려 봐, 아메리카 자전걸 타고,
추락한 별들아. 천진한 가축들아. 공허한 이상들아. 박물관에서 축음기를 틀던 유리 된 자들아. 피카소와 유리잔을 부딪치던, 소외의 시절이 지나갔다. 나의 소년아,
나는 유리인간, 떨어지면 깨-진-다. 주술을 걸어 봐. 날개를 펴 봐. 나쁜 기억의 기관을 살해해 봐. 나를 넘어뜨릴 유리감옥을 깨부숴 봐. 오, 애달피 부르짖는 아방가르드!
지연식 시인 / 피닉스
1 구름에게 바쳐진 찬사를 몸이 도용하다 시간의 새들아; 이것이 우리들의 섬유다 한 벌 의상이며 한철 입고 벗는 옷이다 사라지는 것이 지배하는 이 왕국에서 사상의 육신은 검은, 소, 가죽, 구두다
2 샤먼들의 소굴을 유리 눈으로 보다 유리종 속에 갇힌 자, 찢어진 넝마는 멍에를 맨 짐승과도 같이 내밀한 마찰로 한 가운데 난 시커먼 구멍, 다시 꿰매지 않으면 안되는 구멍
3 하늘과 땅이 다 옷같이 낡아질 것이다* 태양은 밖이 아니라 동굴 내벽에 있는 것, 시간의 유령들이 오기 전에 손을 뻗어 태양을 붙잡아야지 나른한 실밥들은 깨끗이 잘라줘야지
4 이 갑옷은 신이 입어도 손색없다 시간의 새들아; 이것이 나의 섬유다 생명을 직조하는 紅絲는 조금 남아있으니 누가 아는가? 새벽별이 함께 노래하며 내 사망의 다리에 활력이 되어줄지
*『시편』 102편, 25~27절
지연식 시인 / 기억을 향하는 사람들처럼
시의 영토를 확장한 두 사람이 있었다, 여러 개의 바다와 마을을 지닌 보들레르와 김춘수.
한 사람이 惡을 노래하고 한 사람이 善을 노래했다.
별이 가득 찬 감옥에서 서로 만나기로 했다. 그 넓이는 한 구의 죽은 낙타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곳. 기억을 향하는 사람들처럼 위대한 존재가 이처럼, 가까이 다가간 적은 없었다.
한 사람이 죽음을 노래하고 한 사람이 생명을 노래했다.
노래하다가 서로를 놓쳤다. 성큼성큼 지나가 버린, 두 사람의 거리가 세상 어떤 협곡보다도 좁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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