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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차성환 시인 / 흙무더기와 구렁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6.
차성환 시인 / 흙무더기와 구렁

차성환 시인 / 흙무더기와 구렁

 

 

땅을 파고 나서야 흙무더기와 구렁이 생겼다 이곳에

땀을 흘렸으니까 됐어 이제 그만해도 괜찮아

새똥을 맞아본 사람이 하늘을 자주 쳐다보는 법이지

아무 생각도 없이 앉아있으면 아무 생각이 없어서 너무 힘들고

나는 간신히 나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막 울어버리면 좋을 것 같은 비는 내리지 않고

등짝에 달라붙은 티셔츠가 후덥지근하게

강물은 조용히 흐르고 빠르게

빠져 죽어도 좀 나쁘지 않을 것 같은 강물에게

돌멩이를 던지고 멀리 한 번 더 던지고

기다리지 말라고 집에 얘기하고 온 것이 떠올라서

서둘러 구렁 속에 들어가 흙무더기를 덮었다

 

-시집 <오늘은 오른손을 잃었다> 천년의시작

 

 


 

 

차성환 시인 / 버섯

 

 

 가죽 소파에 앉아있던 친구가 버섯으로 변해버렸다 먹어버릴 수 있지만 참기로 한다 친구가 독버섯이면 나는 죽을 수도 있다 내가 버섯을 먹으면 친구는 영영 다시 돌아올 수 없다 나는 죽기도 싫고 친구를 잃기도 싫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버섯은 말이 없다 조용하다 나는 버섯을 먹고 싶지만 조용히 참는 중이다 조용한 버섯 너도 시끄러울 때가 있었지 너는 더 훌륭한 존재가 된 것 같다 버섯을 오래 보고 있으면 나도 버섯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버섯버섯 소리치면 버섯이 될 수 있을까 버섯이 친구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중이다 내 몸에서 버섯 냄새가 난다 버섯의 순간이다 버섯을 생각하며 한 마리의 큰 버섯이 된다 이 침묵과 냄새가 좋다

 

- 시집 〈오늘은 오른손을 잃었다〉 천년의시작 / 2018

 

 


 

 

차성환 시인 / 미주 명신 아진 그리고 나

 

 

 우리는 회현동의 삼류 호텔 술집에 함께 있었다 명신과 나는 술을 나르고 미주는 술을 따랐다 아진은 미주의 옆자리에서 사내들에게 쉽게 가슴을 꺼내 보이던 여자 미주는 아름다운 구슬처럼 화장한 검은 눈이 도도한 여자 그런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사내는 없을 것이므로 미주가 지나칠 때 이는 바람 앞에서 명신과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곤 했다. 그것이 그녀의 영혼이라고 생각했던 명신은 언제부턴가 미주의 앞에서 말을 쉽게 잊었다 미주는 많은 사내들이 찾는 여자였으므로 취한 메뚜기처럼 룸을 옮겨 다니곤 했는데 그러다 사내들에게 들키곤 했는데 명신은 미주 대신 따귀를 맞았고 미주는 호텔 방 키를 들고 사내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날 고깃집 에서 명신은 마른 화초처럼 취했다. 어릴수록 흔한 일에 분노했고 명신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막 전역 한 명신은 눈이 붉은 사내 미주와 아진을 꼬드겨 질펀하게 놀아 볼까 반쪽짜리 농을 치던 나를 노려볼 때도 복학할 때까지만이라고 더듬더듬 말할 때도 그랬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내들은 미주를 사랑했을 것이다 하룻밤 사랑하고 한동안 잊고 다시 하룻밤 사랑하고 기나긴 시간 잊고 다시 하룻밤 사랑하고 긴 시간 잊곤 하며 시간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몇 년 후 명신은 지하철 기관사가 됐다고 마지막 전화를 했다 그렇게 흘러가던 어느 아침 출근길 미주를 본 것이다 내가 열차에서 내리고 반대 방향에서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어두워지면 모이고 해 뜰 무렵 헤어지던 시절의 기억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그 원숙한 여인은 미주였을 것이다. 찌익찌익 웃상자에 박스 테이프 붙이는 소리가 먼지처럼 매캐하던 회현동의 지하철역이었으므로 미주여야 했다 명신 또한 그 시각 뜨거운 바람을 몰고 들어오던 열차의 운전석에서 미주를 봤어야 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아직 열차가 움직이고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봤어야 하는 것이다 한 시절의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듯 어둠 속을 달리는 명신에게 북적거리는 인파 속에서도 한때의 사랑을 단번에 찾아내는 것은 의무 였을 것이다 그날 거기에 미주가 있었고 내가 미주를 봤으며 명신도 미주를 봤어야 하는 것이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뼈저리게 공감하며 명신은 두 눈의 붉은 악력으로 미주 를 움켜쥐고 있어야 한다 나와 아진 그리고 낡은 술집에서의 한때를 기억해 냈어야 한다 그 시절의 표정으로 문 닫는 것을 잠깐 잊어도 좋았을 것이나 명신은 미주를 향한 욕망 혹은 채우지 못한 욕정 대신 자신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떠올리며 열차를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운행은 순조로울 것이고 명신은 조금 들뜬 그러나 중년의 목소리로 안내 방송을 했을 것이다 문 닫습니다 열차 출발합니다 이 열차는 당고개를 출발하여 오이도 까지 가는 열차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니다 특별한 나의 특별한 방송을 중년의 명신은 했을 것이다 지하를 벗어나 중천을 향해 서서히 기어오르는 태양빛 가득한 지상을 언덕을 지나 평지로 때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흰 구름의 동쪽에서 노을 짙은 서쪽으로 나아가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바랄 법한 생을 빗댄 방송을 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랬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쁜 출근길 말 없는 사람들이 생은 어찌 됐건 해피 엔딩이라고 믿으며 출근 도장을 찍을 것이고 하루를 또 다시 살아가는 것이다 모두가 바라듯 해피 엔딩이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이 상투적인 이야기를 써 나가는 이유이지 않은가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의 가볍게 쥔 주먹에서 사연의 모래가 흘러내려 세상은 뿌연 삶의 색이다

 

 


 

 

차성환 시인 / 수제비

 

 

 한밤중에 시를 쓰다가 잠들었는데 시의 요정이 나타나 너도 우아하고 세련되게 시를 찢고 수제비 뜯듯이 시를 뜯어봐 먹기 좋게 연을 주고 행을 나눠 달콤하게 속삭이는데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너는 시의 악마 내일 아침 비가 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삼청동 수제비 먹으러 가야겠다 나는 충분히 연을 나누고 행을 주고 있다 이게 한 행이고 한 호흡이고 다음 연은 곧 찾아올 거다 수제비 한 그릇을 다 먹고 나면 다음 연이 짜잔 나타나 내 시를 이루리라 아직도 한 편의 시가 쓰여지지 않았다 이 새끼야 이 시의 요정 새끼야 넌 영원히 쓸 수 없을거야 쓰기도 전에 실패한 시

 

ㅡ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 (2022, 3월호)

 

 


 

 

차성환 시인 / 털복숭이

 

 

 오래전에 집을 나간 내가 벨을 누르고 문 앞에 서있었다 한 번도 깍지 않은 머리털과 수염과 손톱으로 더럽게 늙고 수북하고 뾰족한 내가 벨을 누른다 방안에 나는 숨을 죽이고 이불 속에 들어가 벌벌 떤다 나는 그가 나라는 것을 안다 그는 내가 그라는 것을 안다 벨을 누른다 내가 참지 못하고 문을 열면 그는 나를 한입에 꿀꺽 삼키고 집에 들어가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깻잎에 밥을 싸먹고 30년 동안 깊은 잠을 자리라 꿈속에서 나는 집을 나와 정처 없이 밖을 헤매다가 이 대문 앞에 이르러 다시 벨을 누르고 비로소 나는 긴 잠에서 깨어났다

 

 


 

 

차성환 시인 / 피크닉

 

 

 밀짚모자에 슬리퍼를 신고 햇빛이 쨍한 공원에 가면 나뭇잎 매달린 큰 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앉아 지나가던 개미들이 쳐다보든지 말든지 갓 구운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발라 와인도 한잔 곁들이고 깔깔 호호 신나게 떠들다가 한여름의 뜨거운 대낮 속 아지랑이처럼 몽롱한 잠에 빠져들면 순식간에 몰려온 개미떼들이 가볍게 들쳐 업고 햇빛 속을 지나간다

 

 


 

 

차성환 시인 / 캐시미어 100

 

 

 따듯한 나라에서 만든 스웨터를 샀다 주문하자마자 벨이 올려 나가보니 삐쩍 골은 양 한 마리가 추위에 떨고 있었다 털이 다 깎여 군데군 데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나오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전화로 항의했지만 연신 사과만 할 뿐 해외직배송이라 시간이 좀 걸립니다 문 밖의 양은 억울한 표정으로 문짝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우선 집에 들여 마시멜로가 들어간 핫초코를 마시게 한다 내 눈치를 보더니 식탁 에 앉은 채로 존다 내 스웨터는 남쪽 섬에서 양털을 짜는 중이다 양털에 파묻힌 직공들이 땀을 흘리는 한여름 속에 있다 나는 애인도 없 고 따듯한 겨울을 보내려던 것뿐인데 알프스에서 온 난민과 방을 같이 써야 한다 냄새나고 코를 고는 양 한 마리와

 

 


 

차성환 시인

1978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 2015년 《시작》으로 등단. 시집 『오늘은 오른손을 잃었다』. 연구서 『멜랑콜리와 애도의 시학』. 2018년 〈시작문학상〉 수상. 현재 한양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