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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마선숙 시인 / 그 길 훤하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6.
마선숙 시인 / 그 길 훤하다

마선숙 시인 / 그 길 훤하다

 

 

눅진한 상처들이

누더기처럼 너덜거려

집을 등지고 먼 곳으로 떠난다

 

회색 나무 속으로 들어간다

 

내 속 어린이

속에서 나와

타박타박 나란히 걷는다

 

일상의 통증들

마디마디 촉촉이 소생한다

 

빈약한 슬픔들이

잠자리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햇살 똑바로 쨍하다

길끝집한채

훤히 보인다

 

 


 

 

마선숙 시인 / Eye

 

 

세상사 빛바랜 광목처럼 안개 끼었다

 

백내장 수술 예약 후

불안이 행진했다

의사가 술 덜 깨 렌즈 떨어트릴까 봐 이를

 

오드 아이

짝짝이 되는 건 아닐까

 

자연 눈 분쇄되어 버려지고

카메라 렌즈처럼 인공 수정체로 갈아 끼웠다

 

내 죄를 낱낱이 알고 있는 진짜 눈

면죄부 주고 싶다

비겁한 것들은 내 것이었기에

 

새로운 눈

상처도 선명하게 적나라해졌다

 

인공 눈과 잘 사귀고 싶은데

그 길

요원하다

 

 


 

 

마선숙 시인 / 부부라는 풍경

 

 

서로에게 매이며

깃든 관습

둘이 하나로 마당 빗자루질한다

 

세상 문 끼워 맞추는 경첩이고

위아래 사이 좋아야 하는 맷돌이다

양날로 세상 가위질하며

 

남편이 오른발 평발이고

아내가 왼 눈 난청임은 묵계다

 

고기 대신 불화를 먹은 날도

치아 틈 벌어진 걸 알기에

요지 챙겨준다

 

그 요지

큰 나무처럼 힘이 세다

 

그렇지만 등 긁어주듯 속마음 실토하면

적과의 동침이다

 

부부

암호문자처럼 해독 어렵다

 

 


 

 

마선숙 시인 / 아버지의 장화

 

 

아버지는 구두 한 켤레없이

목 긴 고무장화를

쇠고랑처럼 무겁게 끌었다

바람 통하지 않는 작은 세계에서

회색이 검정되도록 지게처럼 일하고

속 모르는 컴컴한 진창도

서로 의지하여 건너갔다

세월 흘러 고무장화가 너덜 널덜 헤지자

아버지는 세상을 건넜고

신발은 마루 밑으로 버려졌다

아버지 제삿날

마루 밑에서 신음이 들려 살피니

장화가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버지 옆에 장화를 놓고

술 한잔 올리니

아버지가 활짝 웃었다

아버지의 발은 그제서야 슬그머니 몸을 넣으며

마루 밑으로 다시 들어갔다

 

 


 

 

마선숙 시인 / 전봇대의 혀

 

 

실종된 사람들 전봇대에 다 숨어 있다

부착방지용 뾰족이 틈새로 낡은 가발처럼 달라붙어있다

모든 걸 용서할 테니 집으로 돌아오라는 호소는

눈물처럼 펄럭이고

유괴된 아이를 찾는다는 울먹임은 쇠창살처럼 먹먹하다

돈 빌려준다는 전단지는 사람을 어지럽게 유혹하고

스포츠센터 다이어트 광고는 여자들 계모임처럼 아양 떨고 있다

자살클럽 안내는 가면 무도회처럼 은근하고

당신은 행복하냐고 묻는 수련원 포스터는

도둑맞은 답안지처럼 허탈하다

예쁜 아가씨 넘친다는 대양 나이트클럽 광고는

한 귀퉁이가 떨어져 대야나이트로 발에 밟힌다

 

전봇대는 혀가 바쁘다

 

나를 분실했으니 찾아주면 후사함이란 스토리까지 달고

북새통들을 낙엽처럼 떨구지 않고

삶이 그늘들을 몸에 휘감은 채

현실을 앞장서서 살고 있다

 

 


 

 

마선숙 시인 / 전봇대의 혀

 

 

이 가을에 실종된 사람들

전봇대에 숨어있다

부착방지용 뾰족이 틈새로

낡은 가발처럼 달라붙어 있다

모든 걸 용서할 테니 집으로 돌아오라는 호소는

속치마처럼 펄럭이고

유괴된 아이를 찾는다는 울먹임은

쇠창살처럼 먹먹하다

돈 밀려준다는 신용대출 전단지는

혀 빼물고 사람 유혹하고

스포츠센터 다이어트 광고는

여자들 계모임처럼 아양 떨며 왁자지껄하다

자살클럽 안내는 가면무도회처럼 은근하고

 

당신은 행복합니까 하고 묻는 수련원 포스터는

도둑맞은 답안지처럼 허탈하다

예쁜 아가씨 넘친다는 대양나이트클럽 광고는

한 귀퉁이가 찢어져 대야 나이트로 땅에 떨어져 밟힌다

전봇대는 혀가 길다

나를 분실했으니 찾아주면 후사함이란 스토리까지 달고

숨이 차 펄럭이지만

북새통들을 낙엽처럼 떨구지 않고

땅에 떨어진 전단지까지

묵묵히 몸에 휘감은 채

희망의 신문고를 울린다

 

 


 

 

마선숙 시인 / 자작나무에 닿는 기억

 

 

아버지에게 가는 길

낯설지 않다

 

땅은 수수처럼 붉고 하늘은 하얗다

 

새벽을 깨우던 기침소리 조용해졌다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고 한

어느 시인 시어처럼

우산 팔며 비 좋아하던 아버지

꼿꼿이 선 은빛 자작나무 밑에 묻혔다

 

자작 숲 밤에도 환하다

나무 속 흰 바람 등불 되어

 

아버지에게 닿는 길

문 없다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는

그 고요한 침묵이여

 

 


 

마선숙 시인

서울 출생. 숭의여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3년 《시와 문화》 시 당선. 2014년 《불교문예》 소설 당선. 시집 『저녁, 십 분 전, 여덟 시』, 소설집 『몸이 먼저 먼 곳으로 갔다』. 제 10회 서울 문화투데이 문학 최우수상 수상. 21세기 우수인재상, 숭의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