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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해리 시인 / 친절한 트렁크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5.
박해리 시인 / 친절한 트렁크

박해리 시인 / 친절한 트렁크

 

 

모래바람이 일어날 때,

성장을 멈춘 심장에서 새 가지가 자란다

당신은 간절해지고 당신은 자란다

구멍 속에 당신이 고인다

 

각성된 심장에서 꽃이 핀다

 

모래바람이 데려온 사막,

검은 트렁크가 당신을 쏟아낸다

당신은 모자에서 당신을 뽑아 날린다

마술사의 비둘기는 사막에서 날지 않는다

모래바람이 일어난다

구멍 속에 당신이 고인다

 

트렁크는 당신을 꺼낼 수 있도록 언제나 친절하다

친절한 트렁크를 가지고 있다는 건

모래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이다

 

어제는 검은 트렁크와 모자의 생일이다

오늘은 검은 트렁크와 모자의 생일이다

내일은 검은 트렁크와 모자의 생일이다

 

검은 트렁크와 모자는 매일 어디에서든 태어난다

사막에서 바람이 태어나는 것처럼

 

친절한 트렁크를 가지고 있다는 건

당신이 죽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다

구멍 속에 당신이 고인다

트렁크는 당신을 꺼낼 수 있도록 언제나 친절하다

 

-시집 『당신을 몰라봐서 애틋한 밤입니다』에서

 

 


 

 

박해리 시인 / 고도씨

 

 

고도씨와 밥을 먹고

고도씨와 잠을 자고

 

고도씨는 오지 않고

고도씨는 배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친근함은 여전히 하악질만 합니다

고도씨는 트릿만 훔쳐 달아납니다

 

꼬리가 짧은 고도씨를 잡는 건

도마뱀의 기분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내일이 고도씨를 위해 캣잎 사탕을 준비합니다

처음처럼 사탕을 핥는 고도씨 얼굴은

언제나 싱싱합니다

 

고도씨와 연애를 하고

고도씨와 산책을 하고

 

발정 난 고도씨는 알아보지 못한 어제이어서

밤마다 골목을 떠돕니다

 

우리는 서로 고도일 수 없어

언제나 닿지 않는 그루밍입니다

 

골목 끝에서 가물가물 걸어오는

당신은 고도씨인가요?

 

당신을 몰라봐서 애틋한 밤입니다

 

-시집 『당신을 몰라봐서 애틋한 밤입니다』(시산맥사, 2023)

 

 


 

 

박해리 시인 / 수성못과 오리배

 

 

보라,

무리지어 핀 병꽃나무 꽃잎들

둥근 원을 완성한 저 결속의 테두리에

다시 한 번 밑줄 긋는 해오라기의 비행

 

야속한 개별성이 역설로 피어난다

 

물 표면을 떠나는 오리배

당신을 떠나 가벼워질 것 같던

 

개별성을 버리고 표면을 다시 붙드는 건

오리배의 오래된 습성,

갈퀴질이 노곤해질 즈음

병꽃나무 꽃잎들의 단단한 저 결속을 그리워하겠지

 

몇 걸음도 가지 못하고 실패한 혁명들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당신을 찾으러

당신을 더 잘 보기 위해

표면을 떠났던 오리배,

 

당신 밖에서 더 무거워져

눈물의 본질을 본 그날

비로소 당신을 보았다면

 

갇힌 새장 속에서는, 갓 구운 빵 냄새를 맡을 수 없지

더 갇힌 코라면

너무 투명해 비린 내음까지 맡을 수 있는,

 

본질이란 그런 것이지

안을 보기 위해 밖을 살펴보는 것

밖을 보기 위해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 것

 

녹고 있는 솜사탕을 지키기 위해

오리배가 표면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지

 

-시집 『당신을 몰라봐서 애틋한 밤입니다』(2023, 시산맥사)

 

 


 

 

박해리 시인 / 사월

 

 

 당신 떠나보내고 난 뒤 연두에 내려앉은 햇살이 투명해 눈물이 났습니다 이별 온도가 적당한 사월은 이별하기 좋은 시간입니다 눈물에 곧 초록이 돋아날 테니까요 낯섭니다 처음 맞는 아침처럼 저 연두 떨림 아래서 길을 잃었 습니다 사월의 감정을 모두 가져가 버린 당신, 햇살 한 줌 거머쥡니다

 

 당신은 이렇게 많은데

 어디에도 당신은 없군요

 

 그래요 연두에 내려앉은 햇살, 찰랑이는 바람을 따라가지 않는 건 죄입니다 따라가다 길 잃어보지 않는 건 더 큰 죄입니다 당신은 저 연두의 길을 따라갔군요 무구한 당신, 연두가 초록의 길로 들어설 때까지만 아파하겠습니다 연두의 감정을 읽으려 턱을 굅니다

 

 오롯이 손끝에 모이는 당신

 당신은 이렇게 간절하군요

 

 간절한 것들이 연두로 돋아나는 사월입니다

 간절해서 더 연두인 사월입니다.

 

 


 

 

박해리 시인 / 안개라서 감동입니다

발설은 없고

입술만 가득하다

보이지 않아서

보이지 않아야

박수는 전염된다

발설한 입술은 외롭다

형식을 갖지 못해

입술은 항상 열려있다

마음대로 구겨서

꽃을 만들 수 있다

실루엣이 부추기고

긴 드레스 자락 속 발이

당신을 끌고 가는

이곳은 모호해서

명확한 세계

안개라서 감동입니다

-시집 《당신을 몰라봐서 애틋한 밤입니다》

 

 


 

 

박해리 시인 / 원예용 가위를 들고 서성이는 겨울

 

 

                  영혼은 어느 나라에 사는 새인가

                     겨울도 아닌데 너는 따뜻한 곳으로

                      가버리고 모르는 이국의 새가

                       곁에 와 있다 깃털이 빠져 알몸인 채

                        너를 껴안는다

 

 곁가지를 잘라내야 균형을 얻을 수 있다고

 원예사는 말한다

 오른쪽을 지탱해주던 왼쪽을 잘라내어 왼쪽을 지탱해주던 오른쪽을 잘라내어 나무에게 안정을 찾아주어야 할까

 

 댈러웨이 부인*도, 램지 부인**도 아니어서

 나는 망설이고

 

 잘라주지 못해

 염자는 같은 크기로 성장과 퇴화를 반복한다

 

 새로운 가지를 밀어올리고 안정적으로 보이는 건 습관일까 믿음일까

 

 내게 비친 네가

 네게 비친 내가

 

 외발로 선 왜가리

 두발로 선 왜가리

 

 곁과 균형의 상대성이 떠오른다

 

 편애 없이 우거졌던 봄 여름, 나무는 좋아했을 거야 우듬지에 새들이 날아오고 초록 뱀들이 우글거리던 온통 곁이어서 잘라내야 할 곁이 보이지 않던 계절이었겠지

 

 균형은 믿음으로 점점 기울고

 

 새가 떠나버린 빈 우듬지, 초록과 함께 떨어져 나간 곁들 비로소 곁가지가 보이는 건 다행일까 불행일까

 

 믿음이 웃자라면 슬픔이 된다

 염자는 기울어져 가고 있다

 

 너를 키우는 내내

 우리가 사랑한 것이 두려움뿐이었다면,

 

 서성이는 겨울이 길어지고 있다

 

*, **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속 인물

 

웹진 『시인광장』 2024년 6월호 발표

 

 


 

박해리 시인

1970년 경북 상주 출생. 본명: 朴敬姬. 2002년 『주변인과 詩』, 2004년 『대구문학』으로 등단 . 시집 『당신을 몰라봐서 애틋한 밤입니다』 등. 현재 백전(白戰) 동인으로 활동 중.